[생활속의 수필]무서운 이간질 말, 말, 말

jsmagazine.net | 기사입력 2024/07/17 [16:55]

[생활속의 수필]무서운 이간질 말, 말, 말

jsmagazine.net | 입력 : 2024/07/17 [16:55]

[생활속의 수필]무서운 이간질 말, ,

 

전 영 희

 

 

 

나는 스무 살 초반에 중매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사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지만, 일가친척이 별로 없어서 외로움을 느끼던 어린 시절의 아쉬움 때문에 자녀를 많이 낳아 키우면서 사랑스러운 애들 키우는 낙으로 결혼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폭력성에 견디다 못해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결혼 10년 만에 이혼으로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내 나이 35, 지금껏 10년을 살아 봐도 점점 더 폭력성이 심해지기만 하고, 이기심과 유아성은 여전하다. 앞으로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질 가망성은 전혀 안 보인다. 평균연령까지 산다고 쳐도 앞으로 남은 시간이 50년인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이 아비의 그 폭력성을 보고 배울까 봐 나는 그게 제일 무섭다. 내 인생을 위해서나 내 아들을 위해서도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만 될 때다. 그리고 의심이 많아서 나한테 돈도 맡기지 않는다.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면서 살아도 이것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히고 난 뒤,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했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하는 속담이 생각나서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친정이 아래 지역이다 보니 친정 식구들과 너무 멀어지는 건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아서, 그렇다면 서울과 경남의 중간 지역인 대전으로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니 대전에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모자 임시 보호소가 있기에 미리 전화해서 사전 답사를 다녀왔다. 제법 넓은 평수에서 두 가정 정도가 함께 거주할 수 있도록 방도 2개가 있고 넓은 거실에 화장실도 딸린 아파트형 구조였다. 그리고 예배실이 있었고, 식사 역시 공동으로 하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 학교가 가까워서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대망의 날을 잡아 회한과 정이 든, 내가 손수 땀 흘려가며 배가 부름에도 불구하고 집 앞 냇가의 모래까지 퍼 나르며 정성 들여 지었던 여름에도 시원한 그 튼튼했던 정든 집을 떠나 대전으로 향했다. 이사 값은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남편이 사줬던 반지를 팔아서 마련했다. 다행히 그 반지가 처음부터 마음에 별로 들지 않았었기에 돈을 만드는데 그다지 큰 미련은 없었다.

 

그렇게 떠나는 차 안에서 10살 아들이 갑자기 소리 내어 펑펑 울길래 깜짝 놀라서 왜 우는지를 묻자, “이제 친구들 만나서 사귀고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이사가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요! 엉엉하는데,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파 왔다. 그러나 나는 아들아, 미안하다, 엄마가 정말 미안해. 하지만 여기서 사는 건 희망이 없어. 아빠는 툭하면 엄마한테 물건 던지고 엄마 때려서 병원에도 몇 번 갔다 왔잖아! 너희들 장래를 위해서도 이사 가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철이 들면 엄마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며 서럽게 꺼이꺼이 우는 아들을 진정시켰지만,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어린 아들의 마음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대전 그 쉼터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늘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서 아래층에 있는 예배당으로 가 기도를 했다. 교회와 자녀들과 나의 앞날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하고 나면 모든 시름이 봄비에 눈 녹듯 깨끗이 사라져서 마음이 정말 편안했다.

마침 방학 때였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근처 학교의 운동장으로 애들과 함께 가서 운동장을 돌며 운동으로 현실의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었고, 기도의 조건 때문인지 아이들도 낯선 환경 속에서도 밝게 잘 자라주었다.

 

어느 날 나와 자녀들을 마당에서 다정하게 지켜보던 구세군 교회의 사모님이, “애들 얼굴이 해처럼 맑고 밝게 빛이 나요. 어머니도 어둠이 전혀 없이 평화로운 분위기여서 너무나 보기 좋고 오히려 제가 은혜를 받고 깨우침을 받습니다. 어머니, 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그렇게 온화한 표정이신 것 보면, 정말 내면이 단단하신 것 같고 진짜 정신력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당장에는 어렵겠지만 자녀들도 크고 나면 엄마 심정 다 헤아리고 잘 될 겁니다.” 하면서 말씀해 주시는데, 마음속에서 감사와 기쁨의 고백이 저절로 우러났다.

아무렴요, 누가 함께 해주시는데~! 만왕의 왕, 만주의 주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살펴 주시는데 아무렴요!’

 

그곳에서 지내다 보니 근처의 내가 원하는 교회에 주일마다 가게 됐다. 현실은 암담했지만, 어두움에 고립되거나 주저앉아 있고 싶지 않아서 늘 찬양하고 밝게 웃으면서 아이들과 율동하고 춤을 추며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처럼 날마다 그렇게 지냈다. 그리고 교회 단체 식사를 마치고 나면 나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서 설거지며 뒷정리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두 아유, 어느 지역에서 오셨어요? 어디서 이렇게 우렁각시처럼 참하고 이쁜 사람이 왔을까?” 하면서 나의 존재와 봉사를 고맙게 여기면서 사랑해 주었다.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권사님이, 주일마다 그 남편과 함께 우리를 태우러 와줘서 다행히도 편안하게 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예배 후에는 가끔 밥까지 사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제법 많이 내리던 여름이었는데 그들 부부가 고깃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권사님은 먼저 들어가고 나는 우산을 접고 들어가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내 어깨와 팔에 묻은 빗물을 그 남편분이 손으로 닦으면서 아이고, 비에 감기 걸리겠네.”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는 깜짝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 괜찮습니다.” 하고 웃으면서 아이들과 함께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머리는 너무 복잡해졌고 어떻게 처세를 해야만 좋을지도 사실 정말 막막했다.

 

이 사실을 부인에게 알리자니 오해를 받거나 미움을 받을 게 뻔했고, 가만히 있자니 너무너무 자존감도 상처를 많이 입었고 무엇보다도 불쾌하기 그지없었고 기분도 찜찜했다. 그렇지만 그분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낯선 땅, 낯선 교회에 정착하기가 편하다고 생각했기에 혼자 속앓이를 하며 눈물을 삼키면서 그저 기도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 뒤에도 권사님은 자주 가까운 교회 수련원으로 자녀들과 나를 태워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남편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더니,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면서, “남자가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처자식 안 굶기면 됐지, 더 바래는 건 욕심이야. 자기가 아니면 누가 그 남자를 구원시킬 수 있겠어? 안 그래? 선교사 되겠다고 아가씨 때 서원까지 했었다며? 이제 혼란스러웠던 마음도 좀 안정됐을 테니까 나랑 같이 21일 기도 조건을 세워보자, 수련원에 가서, 어때?” 이렇게 제안을 해왔다.

 

나 역시도 유아적이고 의처증도 심하고 가끔 폭력까지 행사하는 남편이 싫긴 했지만, 애들 아빠의 영혼 구원에 대한 책임감과 측은지심은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기에 그 말이 영적으로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는 판단에서 내 생각을 완전히 비우고 방향을 다시 돌리기로 어렵게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3주 동안 수련원에 가서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면서 같이 오고 갔고, 가끔은 교회 사람들도 함께 갔었다. 그분들은 아유, 젊은 사람이 어쩜 이리 기특하게 애들을 많이 낳을 생각을 다 했을까? 요즘에는 애 많이 낳는 게 애국이야, 애국! 요새는 하나도 잘 안 낳으려고 그런다잖아?” “그러게 말이야, 그러고 애를 많이 낳고도 어쩜 이렇게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냐?” “맞아, 맞아, 그러고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늘 웃는 얼굴이어서 너무 은혜롭고 보기 좋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권사님이 한 번씩 뒤에서 내 험담을 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얼마나 나랑 애들을 많이 챙기고 위해 주시는데, 이렇게 오해하면 내가 나쁜 사람이야. 내 피해의식일 수도 있어.’ 하고 애써 외면하면서 늘 웃는 얼굴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3주가 지난 어느 날, 약속대로 권사님과 함께 집으로 내려가 애들 아빠와 셋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매정하게 자기를 버리고 간 여자를 대하는 그 남자의 시선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내가 바람이 났다고 단단히 오해까지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나를 냉소적으로 대하기까지 했다.

거기서 자리를 떠서 돌아오는 길에 어쩐 일인지 그 권사님은 오히려 나를 나무라면서 내가 볼 때는 당신이 문제가 많지, 남편은 상당히 사람이 좋네, 성실해 보이고~! 자기만 잘하면 되겠네! 애들한테는 아무리 못난 것 같아도 친 아비 이상이 없어, 그러니 그냥 눈 딱 감고 아무 말 말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서 나 죽었네 하면서 남편 말 잘 듣고 살아.” 이렇게 말했다.

순간 권사님은 내 편일까? 애들 아빠 편일까? 그렇지만 이것 역시도 내가 좋게 생각해야겠지? 부부지간에 100% 잘못이란 건 없는 법이니까.’ 하면서 좋게 해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사실 나는 결혼 전에 선교사 서원도 했었던 사람인지라, 영혼 구원에 대해 강조하니 신앙심 하나로 버티며 살아온 나로서는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내 입장만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래도 남편은 열심히 살려고 노력은 정말 많이 했었지, 애들한테도 나름 잘했었고. 무엇보다도 지옥에 가도록 버려둔다는 건 정말 너무 가혹한 일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음이 좀 복잡해졌고, 급기야 그 권사님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교회 봉고차를 얻어 타고서 다시 집으로 아이들과 함께 돌아가게 됐다.

 

그러나 남편은 집의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밖으로 다니면서 아예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급기야는 집 앞에 쌓아뒀던 우리 짐 상자들을 집 앞 냇물에 전부 다 갖다 던져버렸다.

그걸 본 나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기에 화를 꾹 누른 채 그걸 급히 전부 다 끄집어내서 이웃집 언니한테 부탁하여 젖은 옷들을 세탁해서 말리고, 책은 일부는 버리고 일부는 햇볕에 말렸다.

 

그렇게 고생하며 며칠을 버티고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가까운 모자보호 시설에 전화를 해봤더니, “상황은 안타깝지만, 지금은 자리가 없어요. 빈자리가 생기면 곧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어머니라고 했다.

이런 게 사면초가라는 거구나 절감하면서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에서 힘없이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면서 제발 주님, 하나님, 저와 아이들을 좀 돌봐주세요, 저는 지금 오갈 데가 없습니다. 그 어디에도.’ 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하며 그렇게 또 며칠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자보호 시설에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어머니, 하늘이 도우셨는지 마침 커다란 빈방이 하나 생겼어요. 오늘 밤에라도 얼른 오세요!”라고 했다. “, 선생님 차를 구해서 최대한 빨리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역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기도드린 후 다시 내가 다니던 교회 강도사님께 부탁하여 짐들을 싣고 모자보호 시설로 발길을 옮겼다.

 

그 뒤에도 가끔 그 권사님을 수련원에서 뵙게 되었고, 마주치면 웃으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지냈지만, 내가 아는 지인들에게 또 뒤에서 몰래 내 얘기를 험담하는 걸 은연중에 눈치채고 알면서도 나는 늘 모른 척 그냥 바보처럼 웃음만 짓고 살았다.

그 뒤 1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엔가, 그 권사님 남편분이 헬기 조종사였었는데 제주도에서 근무 중에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인해 바다에 추락사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멀리서 전해 들은 나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하물며 본인은 어떠했겠는가?

실로 그 소식은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집을 떠나온 지도 어언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남편은 새 여자를 얻어서 아들도 하나 낳고 10년 넘게 살고 있지만, 교회와 신앙을 완전히 등지고 나를 그렇게도 못살게 굴고 자기가 바람피워 놓고는 오히려 내가 바람이 났다고 의심하고 욕하고 핍박하던 그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안 돼서 결국에는 새 여자의 돈을 많이 빌려 써야만 했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그리 순탄치 않게 살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표현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자존감이 건강하지 못할수록 다른 사람 이야기도 재미있는 가십거리로 잘 옮기는 편이다.

그러나 말과 행동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물론 인간이기에 누구나 완벽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남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은 여호와께 은총을 입고, 남의 허물을 들춰내고 이간질하고 험담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행한 대로 무서운 대가를 받는다는 것을, 나는 살면서 무서울 정도로 많이 보아왔고 겪어 왔다.

 

아이들 고향에서 살 때, 나와 우리 교단을 함부로 판단하고 나를 마치 벌레같이 보고 심지어 내 앞에서 심한 욕까지 했었던 어떤 세 사람은 결국 유명을 달리하게도 하시는 정말 두려운 하나님이심을 직접 겪었었기에, 나는 말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으며 살아왔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중 하나가 험담, 즉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다.

 

살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하신 전능자 하나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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