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토크]창조주의 사랑

jsmagazine.net | 기사입력 2024/07/31 [16:02]

[뉴토크]창조주의 사랑

jsmagazine.net | 입력 : 2024/07/31 [16:02]

<창조주의 사랑>

 

JS매거진 편 집 부

 

▲     ©jsmagazine.net

 

신이 무()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답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하려면 당연히 그렇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칼 세이건, ‘코스모스’).”

 

(1) 오래된 질문

 

'창조주의 창조주' 문제는 케케묵은 오래된 질문이다.

지금껏 아무도 답을 안하니 그냥 묻어두고 갈 만도 하지만 왠지 묵혀두고 가면 판정승으로 지는 거 같아서 넘어갈 수가 없다.

 

"[웨이랜드]: 넌 내 피조물이다.

[인공지능 데이빗]: 당신이 절 창조했다면 당신은 누가 창조했죠?

[웨이랜드]: 오래된 질문이군. 언젠가 너와 함께 답을 찾고 싶구나. 이 모든 것, 이 모든 예술과 디자인과 인간의 독창성도 그 질문 앞에선 아무 의미 없지. 우린 어디서 왔는가? 난 안 믿는다. 인류가 분자 활동의 부산물에 불과하고 생물학적 우연으로 탄생한 존재라니. 아니야. 분명 뭔가가 있어. 너와 내가... 함께 알아내자꾸나(에일리언 시리즈 영화 '프로메테우스')."

 

창조주의 창조주 문제는 창조주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한 채 무조건 창조의 과정을 거쳐서만 생겨나야 한다는 프레임에 우겨넣어 창조주의 본래 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시도이다.

애초에 창조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문제의 시작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서 정의를 내려야 하는데 첫 창조를 시작한 분으로서 창조주, 조물주로서 명칭을 정하니 자연스럽게 창조주의 창조주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질문 자체가 악의적인 의도를 품은 잘못된 물음이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애굽기 3:14, asv)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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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화 속에서 나온 창조자들

 

마블의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비전은 자신에 대해 'I AM'이라고 말해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분명하게 스스로 생겨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성경의 표현과 똑같이 말해 스스로 있는 자역시 그런 존재라고 본질을 흠집 내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비전] I am not JARVIS. I am not Ultron. I AM!(영화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또한 역시 마블의 영화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vol 3'에서 스스로 신의 위치에 오르려고 하는 악당이 나오는데 왜 신이 있으면 세상이 이러한 모습이냐면서 자신이 더 이상적인 창조물을 만들어내겠다고 나선다.

 

“[하이 에볼루셔너리] 신은 없어. 그래서 내가 나선거고. There is no god.[5] That's why I stepped in(영화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vol 3’).”

 

‘High Evolutionary’라는 이름에는 고도로 진화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우주 안에서 진화를 거듭한다고 해서 우주를 만드는 창조의 역할까지는 도달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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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학자들이 접근한 방법

 

무신론자로 유명한 영국의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라는 저서를 쓰기도 했다.

그는 우연한 기회로 비트겐슈타인을 소개받고 제자로 가르치다가 후에는 그로부터 반박할 수 없는 비판을 받고 사실상 논리학에서 손을 떼게 된다.

러셀은 화이트 헤드 교수와 함께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라는 저서를 통해 수학의 기초를 완전하게 구축하려다가 실패하고 만다.

이 당시에 비트겐슈타인과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메타 논리를 통해서 수학의 기초를 한 단계 더 높게 쌓고 또 쌓아 올리다가 결국은 거북이 위에 거북이를 계속 쌓아올린 격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거북이가 나온 이유는 인도 철학에서 이 세상이 코끼리 등위에 거북이가 떠받든 세계 위에 존재한다는 고대 사상을 빗대어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계속해서 한 단계 높은 메타 언어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의미가 없다면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고 정언명제를 제시한다.

엄마의 엄마의 엄마...’ 이러한 끊임없는 물음의 답은 족보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에서는 아담과 하와에서 멈춘다.

물론 아담과 하와도 부모가 있었다고 성경에 나온다.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결국 가장 오래된 족보가 들어있는 성경에서도 답을 찾지 못한다.

창조주의 창조주문제도 끝없이 그 위로 기원을 찾아가다가는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에 이르게 된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의도는 영적 세계는 설명할 자료가 부족하니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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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허무함을 넘어서는 목적

 

이러한 결론은 아직도 창조주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스스로 존재했다'는 선언적인 말씀 외에는 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여러 물리학자들의 상상력대로 이 우주는 더 거대한 우주에 포함된 작은 우주일 수도 있다.

또는 실제로 다중 우주가 존재해서 우리의 우주 외에 다른 우주가 또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방법이 아직까지는 없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우주는 시작점이 있었으며 이를 창조한 창조주가 계시고 그의 말씀대로는 스스로 존재하신 존재자다.

이러한 체계가 존재하도록 즉, 창조주가 스스로 생겨나도록 시스템을 구성한 더 높은 차원의 창조주가 또 있으리라고 상상하더라도 우리가 속한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가 사랑을 목적으로 우리의 우주를 창조했으며 동일한 사랑으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 지구를 태어나게 하고 그러한 환경 위에 인간이 존재케 하여 육신으로 영을 만들어 완성 단계까지 성장한 인간의 영이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히 사랑하며 살게 계획하셨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인정한 스피노자의 신처럼 우주를 만들고서 아무런 개입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영원한 사랑을 목적으로 두고서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존재자라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고 고맙게 느껴진다.

몇몇 무신론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전자 전달 기계일 뿐이거나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밖에는 다른 삶의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

물질적인 육신 차원에서만 살다가 끝나는 것이 아닌 우주를 넘어선 더 넓고 무궁무진한 영적 세계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기쁜 삶인지는 무신론 과학자들이 인간의 삶의 이유를 허무함의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깊게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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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창조주를 사랑하는 것의 의미

 

의도와 다르게 영적인 세계까지 가봐야만 창조주의 창조주문제를 해결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적어도 창조주의 기원을 따지다가 자칫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족을 통해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주고받는 것도 근본은 창조주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기존 기성 기독교 교리로는 위의 본문에서 나오는 복수형의 우리라는 표현을 오직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논리에 억지로 끼워 맞추다가 이해할 수 없는 교리를 만들어냈지만 실제로 하나님과 성령님은 영의 아버지, 어머니로서 독생자 성자와 세 분이 하나의 뜻과 마음으로 창조와 구원의 과정을 이루고 계시다.

다르게 말해서 영적인 세계의 한 가정과 같다.

기성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이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단지 우상을 경계하라는 십계명의 말씀에 따라 오직 한 분이어야 한다는 논리에 묶여 성경적이지 않은 교리에 스스로 갇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성령님은 어머니로서 그리고 성자는 독생자 아들로서 각각 역할을 하고 계시다.

이러한 하늘의 완전하고 이상적인 사랑을 그대로 이 땅에서도 구현하시고 지상천국을 이루게 하시고자 하셨다.

 

(마태복음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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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가 사랑을 하는 마음, 사랑을 받고 싶은 갈망, 설렘 등 이 모든 사랑의 감정들의 근본 시작은 성삼위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강의 상수원을 막으면 하류가 말라버린다.

창조주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우연히 인간이 생겨난 것으로 보는 논리는 근본적이고 가장 첫 시작이 되는 사랑의 기원을 끊어버려 삶의 목적과 이유를 잃고 방향 없는 삶으로 만들어버린다.

 

내 첫 번째 책(이기적 유전자)을 출판한 한 외국 출판인은 책을 읽은 후 사흘 밤이나 잠을 설쳤다고 고백했다. 책이 주는 냉혹하고 암울한 메시지에 매우 괴로웠다는 것이다. 다른 독자들은 내게 어떻게 아침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어떤 외국인 교사는 한 여학생이 이 책을 읽고 인생이 허무하고 목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며 눈물을 글썽이며 자기에게 찾아왔다고 내게 항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허무주의적 염세관에 물들지 않도록 그 학생의 친구 누구에게도 이 책을 보여 주지 말도록 충고했다고 한다(리처드 도킨스, ‘무지개를 풀며’).”

 

▲ 리처드 도킨스   

 

(6) 근본 창조목적을 되찾는다

 

창조목적은 곧 인류의 존재 이유가 된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 이런 장난 섞인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누구도 쉽게 한마디로 이런 농담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다.

이제는 사랑이 답이라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딸, 내 아들, 부모님을 위해서 존재하거나 내 아내, 나의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사는 것을 넘어서 근본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삶은 100년으로 끝이 아니라 계란 껍질을 깨고 병아리가 태어나듯이 육신의 껍질을 통해 성장한 영이 영적 세계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지구 세상에서 영을 성장시키는 과정을 지나고 있다.

그러니 내 자녀, 부모, 애인은 근본의 사랑을 본뜬 과정 속의 사랑일 뿐이다.

그렇다고 가족의 사랑, 연인과의 사랑이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더 높은 단계, 더 깊은 차원의 사랑이 존재함을 깨달으라는 의미다.

이 사랑을 깨닫고 온전히 느낄 때 제대로 위치를 잡고 의미를 알아서 삶의 목적이 제대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시점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하고 건강하며 이상적인 사랑이 지상에서도 천상에서도 이뤄지는 것이다.

 

이제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면 된다.

 

"나는 영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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