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를 온전히 알고 동성애를 바라본다>
2부 육과 영의 관계
JS매거진 편 집 부
"자기 영은 자기의 기본형을 닮았습니다. 자식이면 부모를 닮듯이 그렇게 어떻게든 닮아있습니다. 전혀 안 닮지는 않았습니다. 쌍둥이 닮듯이 닮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닮아 있습니다.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성 원리이기 때문입니다(정명석 목사, '1996년 11월 21일 아침말씀')."
(1) 육신으로 영을 만든다
먼저 육신이 남성인데 영은 다른 성별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두 번째로 육신이 성역할을 다르게 하거나 성전환 수술을 했을 때 그 영의 성역할이 바뀌거나 성별이 바뀔 수 있는지를 따져본다. 일단 성경을 보면 왜 육신의 행실이 영에 영향을 주는지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0일 금식하여 굶주린 예수님께 사탄이 시험했을 때 이 내용을 인용하시면서 물리치셨다.
(마태복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육신은 떡(빵)을 먹고 성장하지만 영은 말씀을 먹고 산다고 하였다. 어떻게 영이 말씀을 먹는다는 것일까.
(로마서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속사람’은 영을 말한다. 하나님의 법은 말씀으로서 육신이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즐거워하듯이 진리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말씀을 먹고 영이 성장한다는 것일까. 존재 원리와 이치대로 사는 것이 답이다. 식물은 온도, 습도, 양분, 햇빛이 적절히 주어져야 자란다. 육신이 진리의 법칙을 지켜서 매일 살아가는 것이 곧 영이 존재할 수 있고 성장 가능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법칙이라는 것은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지구가 태양에서 멀리 떨어지면 온도가 떨어져 생명이 존재할 수 없게 되고 너무 가까워도 뜨거워서 수성이나 금성처럼 생명이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말씀이 법칙이다. 하나님의 법이 진리이다. 이것을 온전히 깨닫고 육신으로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영이 제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형성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육신의 몸으로 심고 영으로 거둔다고 비유했다.
(고린도전서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육의 몸>이 있듯이 <영의 몸>이 있습니다. <썩을 것>이 무엇입니까? 죽으면 썩어 없어지는 ‘육’입니다. 그렇다면 <썩지 않을 것>은 무엇입니까? ‘영’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했는데, 곧 ‘<육>으로 심고 <영>으로 다시 살아난다.’ 고 했습니다. ‘<육>으로 심고 <영>으로 다시 살아난다.’라는 말은 ‘<육신>이 행한 대로 <영>이 그 행위를 받아 변화되어 영광을 누린다.’라는 말입니다(정명석 목사, '2014년 6월 8일 주일말씀')."
이는 육신의 행실이 기반이 되어 영이 성장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마치 육신이 뿌리와 같고 혼이 줄기가 되어 뿌리에서 빨아들인 흙 속의 양분과 수분이 줄기로 전달되어 영으로 열매 맺는 것과 같다.
"<육>이 ‘씨’가 되어 <자기 영의 구원과 휴거>를 위해 희생하면, <영의 싹>이 새롭게 자라서 수천, 수만 배를 거두게 됩니다. <씨>를 뿌리고 <곡식>으로 거두듯, <육의 씨>로 뿌리고 <영의 곡식>으로 거둡니다. 곧 <육>으로 뿌리고 <영>으로 거둡니다. 곧 <육>으로 심고 <영>으로 살아납니다(정명석 목사, '2015년 11월 11일 수요말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육신의 행실을 강조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심지어 행한 대로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러므로 육신의 행실이 영으로 결실을 맺으므로 영이 가는 세계가 결정되는 구원 문제로 직결된다.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영이 성장하여 완성되지 않으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렇게 예수님이 실천적인 믿음을 강조한 이유도 역시 영의 형성과 성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2) 내 행위대로 만들어진 영
그리스도인 동성애자들은 이제 성경을 제대로 깨닫고 말씀대로 행하여 영을 온전히 만들어야 한다. 성경을 모르는 동성애자들에게도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영이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신이 구원 받아서 목숨을 건지는 것은 길어야 100년이다. 하지만 영은 영원히 존재한다. 결국 구원 문제는 영에 관련된 것이다. 육신은 영을 만드는 요람과 같다. 육신의 행실이 그대로 영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진리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자신의 영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이 영으로 나타나시면 선생은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늘 마음껏 눈도, 얼굴도 오랫동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10분, 20분이고 선생을 쳐다보셨습니다. 자세히 볼 때 깨닫게 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형상과 모양도 중요하지만, 육이 행한 것으로 영이 갖추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에게서 육의 행함이 풍기고 그 육이 행한 대로 영이 그 형상과 모양을 입음을 느끼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져 보니 육신같이 만져져서 ‘예수님, 예수님이 부활 후에 말씀하신 것처럼 살과 뼈가 있는 육신같이 만져지네요.’ 하였더니, ‘생명체로 형성된 영, 완성된 영은 형체가 있지.’ 하셨습니다. 영인데도 육신과 같이 만져져서 끌어안고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하니,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하시며 ‘하늘나라에는 너의 이 영체가 가서 하나님, 성령, 성자를 중심하여 영원토록 사랑하며 산다.’ 하셨습니다(정명석 목사, ‘2024년 6월 9일 주일말씀’).”
이렇듯이 영을 성장시켜 온전히 형성해야 한다.
(3) 여성과 남성으로 창조하신 이유
모든 자연법칙을 잘 살펴보면 그렇게 해야 환경에 잘 적응하여 생존하기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리를 보면 그렇게 창조하신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3. 형상이나 모양이나 사연들이 쌍둥이같이 서로 닮아서 ‘짝’이 되기가 어렵다. 5. 가령 결혼해서 남녀가 같이 살게 됐다 하자.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같은 것’을 가졌으면, 기쁨은 ‘한 개’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것’을 가졌으면 그로 인해 각각 기쁨을 얻으니, 기쁨은 ‘두 배, 세 배’가 된다. <남자>가 ‘도시’에 집을 가지고 있는데 <여자>도 ‘도시’에 집을 가졌으면, 별로다. <여자>는 ‘도시’에 집을 가지고 있고 <남자>는 ‘산속’에 가지고 있으면, 서로 ‘짝’이 되니 좋다. 또 <남자>가 ‘귀중품 시계’를 가지고 있는데, 여자도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같은 것이라 별로다. 이는 마치 축구공만 두 개를 가진 것과 같아서 축구만 할 수 있는 격이다. 축구공과 배구공을 각각 가졌으면, 축구도 하고 배구도 하니 두 가지로 기쁨을 얻고 누린다.6.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다른 형상’으로 서로 ‘짝’이 되게 창조하셨다. 고로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 짝이 되면, 이는 ‘비원리적’이다. 마치 같은 쌀밥인데 이 밥 저 밥 넣고 비비는 격이다. 서로 다른 쌀밥과 보리밥을 넣고 비벼야 ‘쌀밥의 맛’도 나고, '보리밥의 맛’도 나고, '둘을 섞은 맛’도 나서 ‘세 가지’ 맛이 나니, ‘맛이 좋다.’ 한다. <사람>도 <만물>도 모두 그러하다. 7. 월명동에도 소나무만 두 주 있는 것보다 하나는 소나무, 하나는 느티나무로 존재하면 서로 ‘짝’이 되어 매치가 된다. 그러면 <느티나무> 밑에 앉아서 그 옆의 소나무를 쳐다보며 ‘소나무의 멋과 아름다움’도 느끼고, 또 <소나무> 밑에 앉아서 옆의 느티나무를 쳐다보며 ‘느티나무의 맛’도 느낀다. 또 <운동장>에서 ‘두 나무의 조화’를 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8. 또 <바위>만 두 개를 놓는 것보다 바위를 하나 놓고, 그 옆에 소나무를 심는 것이 ‘짝’이 되어 더 아름답다. <큰바위얼굴바위>도 ‘소나무’를 짝으로 삼아서 옆에 심었더니, 바위를 두 개 놓은 것보다 더 아름답고 좋았다. 9. 사람이 각자 개성도, 생긴 것도 극으로 달라도 하나님은 목적을 두고 ‘짝’이 되어 사명을 하게 하신다. 하나는 ‘내적 증인’이고, 또 하나는 ‘외적 증인’이다. 교회 안에서도 보다 ‘내적 증거’를 하며 사명을 할 자와 보다 ‘외적 증거’를 하며 사명을 할 자가 있다. 그런데 서로 생각도 행실도 안 맞다고 한다. 결혼했어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생각이 안 맞고 성격이 안 맞으면 이혼한다. 하나는 뜨거우면, 하나는 시원해야 짝이 된다. 그래야 더울 때 시원하게 하고, 추울 때 따뜻하게 하지 않겠느냐. 자기와 ‘생각’이나 ‘하는 방식’이 달라도 하나님은 각자 개성을 보고 좋아 쓰시니, 넓게 보고 행하여라(정명석 목사, ‘2017년 8월 28일 새벽잠언’).”
무성생식은 유성생식보다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가 불리하다. 이러한 원리를 봐도 인간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사랑하는 것이 원리적이고 합당하다. 근본의 세계가 중성이거나 성별이 자유자재로 바뀐다면 그를 닮게 창조된 물질세계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일을 그렇게 형을 따라서, 만물의 구조에 따라서 일을 하셨다. 사람의 근본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만물의 근본은 사람에게서부터 만들어 졌다. 결국 지구의 모든 형을 하나님 보고서 만드셨다. 구조와 기본 원리는 동일하다. 거죽은 살(흙), 속은 뼈(돌)이다. 힘줄은 산맥이고 핏줄은 물줄기이다. 이런 기본형으로 만들 때 구조가 맞는다(정명석 목사, ‘1995년 4월 20일 아침말씀’).”
(4) 그리스도인의 사랑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도 성소수자로서 육적인 사랑을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뜻과 마음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만 말하면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그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자가 온전한 신부가 될 수 있다.
(히브리서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의 삶은 육신만 행복하게 살고 끝나는 것이 아닌 영혼을 구원하고 자기 영을 예수님의 신부로 완성시키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각각 따로 계시나 함께 행하시는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은 분명히 남성신, 여성신으로 존재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그에 맞게 사랑하시기 위해 창조하셨으니 그 창조의 원리대로 살아야 신의 사랑의 상대체로 영원히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그 아는 지혜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방향을 땅으로만 향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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