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 다르게 보기>
JS매거진 편 집 부
[영화 조커 포스터, 이미지 출처:Daum이미지]
왜 배경을 1980년대로 했을까. 청소부들이 파업하여 쓰레기가 넘치는 거리에 쥐가 질병을 옮기는 고담시의 음울한 거리가 펼쳐진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그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낸다. 산 자와 죽은 자, 선과 악이 뒤바뀐 세상이다. 언제인가부터 악인이 주인공이 되기 시작했다. 악한자를 우상화하고 그의 삶을 조명한다. 이제 욕망하는 것이 선이고 원치 않는 것은 악이 되는 것인가. 배경이 되는 고담시는 이성과 윤리가 내려앉고 원초적인 욕구가 떠오른 도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1) 만들어진 존재
조커는 만들어진 존재다. 등장인물 아서 플렉이 조커라는 새로운 인격으로 변해간다.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 보면 어느 순간에도 직접 선택한 것이 별로 없다. 조커 스스로 자신을 위한 결정을 한 부분이 생각보다 드물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이다. 태어나서 버림받았기에 입양 되었을 것이고 어머니와 동거하던 남자에게 학대받고, 입양했던 어머니조차 그것을 방조했다. 사회의 부조리는 그를 더욱 더 악한 쪽으로 몰고 간다. 사회 복지 제도마저도 그를 버리고 그가 가진 '웃음 병'(감정실금Emotional incontinence)은 더욱 더 그를 비참하게 만든다. 동료가 그에게 총을 주어 일자리를 잃게 만든 것도 수동적인 상황이고 그로 인한 분노는 결국 원치 않던 살인까지 이어진다. 자기가 가장 존경하고 바랐던 스탠딩 코미디의 거장조차 그를 조롱하고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토마스 웨인역시도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 리 퀸젤(할리 퀸)은 조커가 그의 본질인 것처럼 부추긴다.
“리 퀸젤: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조커’니까(조커: 폴리 아 되, 2024년).”
주변의 모든 상황과 여건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간다. 이 모든 과정에 아서의 자유의지가 발현된 부분은 극히 적게 나타난다. 그가 분노를 표출할 때조차 이성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대중의 선동은 그의 악행을 더욱 부추긴다. 아서는 조커라는 모습으로 희생양이 되어간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하나의 희생양으로써 모든 가능한 희생양들을 대신하는 것으로, 동물로써 인간을 대신하는 경제적 기능뿐 아니라 좋은 폭력으로 나쁜 폭력을 막는 종교적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르네 지라르, '희생양', 347p)."
그가 진정으로 원해서 했던 행동은 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관객은 조커의 변화를 보면서 어떤 공감이나 위안을 얻을 수 있는가.
"아서: 그냥, 조크가 하나 생각나서 ... 당신은 이해 못할 거야(조커, 2019년)."
[이미지 출처:Daum이미지]
(2) 조커에 열광하는 사람들
영화 속에서만 조커의 탄생에 열광하지 않는다. 많은 비평가들도 이 영화에 매우 좋은 평가를 한다. 큰 영화제에서 예술 영화만 받았던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암울하고 비극적인 메시지에서 도대체 무엇을 발견하였기에 조커로 변화된 계단을 직접 걸어보기까지 하며 '조커 계단'이라고 이름 붙이는 걸까. 조커가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관객은 자신이 냈던 분노와 반성해야 했던 행동들에 대해 대신 공감 받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무명인들은 조커라는 희생양을 원한다.
"요컨대 희생양을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살해자들이다(르네 지라르, '희생양', 148p)."
사람들은 자신의 부조리를 조커에게 집중시키고 정당화하고자 한다.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사회의 부조리 탓으로 돌리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실패 자신의 고통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지 조커를 통해 분출하고 싶어한다.
[이미지 출처: Daum이미지]
(3) 그려진 웃음
조커는 계단 벽에 '웃는 것을 잊지마Don't forget to smile'라는 벽보 글씨를 '웃지마Don't smile'라는 내용으로 바꿔버린다. 그러면서 오히려 광대 분장에 자신의 피를 더하여 빨갛게 더 많이 웃는 모습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웃기는 존재인가 웃는 존재인가. '웃지 말라(Don't smile)'고 했으니 웃지 않는다면 남을 웃겨야 한다. 자신의 고통으로 남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아서: 난 지금까지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O같은 희극(Comedy)이더라고(조커, 2019년)."
그는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가는 것을 깨달았을까.
(4) 선과 악의 구분이 넣은 비극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존재 법칙을 벗어나면 멸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구분된 선과 악의 기준과 구분법을 강요할 때 생겨난다. 모호하게 구분 짓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그 구분을 상대에게 강제할 때부터 오류가 생겨난다. 어쩌면 최선과 그 외의 것들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가장 잘 존재하는 법칙과 상태가 있고 그렇지 못한 나머지 상황들이다. 최선이 존재하지만 모두가 최선이 되지 않는다고 틀렸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커는 반대로 최악의 상황들이 모여서 뭉쳐진 존재다. 조커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최선에서 가장 멀어진 것들과 상황들이 집약되고 고인 곳에서 스멀스멀 태어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미지 출처:Daum 이미지]
(5) 부조리를 거부한 존재
아서는 사회의 부조리가 걷히길 바라는 자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부조리를 고발했다면 아서는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나타내고 사라지길 기다리는 자이다. 자신을 옭아맨 강요와 압제를 끊고 싶어한다. 조커가 망상에 사로잡힌 모습은 니체를 소환한다. '조커 2: 폴리 아 되(Folie à deux)'에서 니체를 마주하게 된다. '폴리 아 되'는 '광기의 공유' 혹은 '두 배의 광기'를 뜻한다. 길 한 가운데에서 매를 맞고 있는 말을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정신이 이상해져 광인이 된 니체와 겹쳐진다. 니체는 그 순간 말을 때리는 마부, 매 맞는 말에게서 사회의 부조리를 보았을 것이다. 니체가 미쳐버렸듯이 아서도 부조리를 마주하고 조커가 된다. 더 나아가 리 퀸젤과 함께 광기를 두 배로 드러낸다.
[영화 조커:폴리 아 되 포스터, 이미지 출처:Daum이미지]
(6) 계단의 의미
계단에서는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둘 중 하나이다.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 1편에서는 악의 계단을 점차 올라가는 느낌을 관객들에게 준다. 악의 화신으로 변해가는 조커 1편과 달리 2편에 이르면 계단을 내려온다. 더 이상의 조커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최후 변론에서 아서는 조커를 내버리고 만다.
"아서: 조커는 없다(조커: 폴리 아 되, 2024년)."
다들 아서가 계단에서 조커로 각성했다고 표현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조커라는 광대 분장이 억지로 덧입혀졌을 뿐이다. 모두들 아서가 왜 조커를 스스로 부인했는지 아쉬워한다. 리 퀸젤은 그런 아서에게 실망하고 그를 버리고 떠나간다. 우리는 아쉬워하고 실망해서는 안된다. 그때가 바로 아서가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제대로, 적극적으로 발휘한 시점이다. 부조리가 만들어낸 망상의 존재, 조커가 아닌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기로 선택한 아서의 본 모습이다. 그 순간에 이르러 아서는 진정한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제야 되찾은 자유를 누릴 시간은 길지 않았다.
(7) 조크의 죽음
코미디언 머레이를 죽일 때 조커가 한 말이 배트맨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이 죽을 때 반복되고 아서가 죽을 때 또다시 되풀이 된다. 부조리에 억압받은 대중은 조커를 숭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조커는 희생양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스탠딩 코미디처럼 농담(Joke)과 함께 끝이 난다. 그가 머레이를 스탠딩 코미디에서 죽인 것처럼 그도 그렇게 죽어간다.
"죄수: 바로 뒈져도 싼 놈이 되는 거야You get what you fucking deserve(조커: 폴리 아 되, 2024년)."
그의 죽음에 바쳐진 농담에도 술에 잔뜩 취한 코미디언이 나오며 술의 신 바커스(디오니소스)에게 제물로 드려진다.
(8)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완벽하게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 어쩌다가 전혀 어울리지도, 사이즈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나오면 불편하고 빨리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아서는 조커라는 망상을 분장하고서 돌아다니면서 정말 이 옷이 내게 잘 맞는다고 느꼈을까. 그가 부정했던 조커의 망상은 결국 그의 것이 아니었다. 많은 영화평에서 아서가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이 조커가 아니라고 했던 것에 실망감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다. 아서는 본래의 자기 자신을 찾아가려는 의지를 발휘한 것이다. 그들이 실망한 모습에는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했던 마음이 드러났을 뿐이다. 자기들이 처한 고통을 한 사람의 희생양에게 대신 지우려는 또 하나의 제의적 춤이다.
(9) 조커의 춤
춤을 추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살인할 때마다 조커는 춤을 춘다. 속편에서는 더욱 많은 부분이 춤으로 표현된다. 조커가 추는 춤의 의미는 이렇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어느새 그리스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스는 철저한 계급사회였기에 평민을 비롯해 여성과 노예 등의 하층계급에게 억눌린 욕망의 배출구가 필요했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들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이들은 술에 취해 집단적으로 광기에 빠졌고, 산이나 숲을 배회하며 마주치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찢어 죽였다고 한다(오지훈, ‘희생되는 진리’).”
2024년 프랑스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온몸을 파란색으로 분장하고 술에 취한 듯한 자세로 등장한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 배우가 분장한 인물이 바로 술의 신 바커스, 즉 디오니소스이다.
"마이크를 쥔 남성은 폭력의 부조리함을 유머러스하고 시적으로 담은 '디오니소스의 노래'를 불렀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노래에 맞춰 느린 속도로 춤을 추기도 했다. 올림픽 공식 계정은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는 인간 사이의 폭력의 부조리를 깨닫게 한다'며 해당 공연의 해석을 덧붙였다(머니투데이, 민수정 기자, '세계인 대혼란 빠진 개막식 이 장면... 디오니소스? 파파스머프?', 2024.7.27)."
술과 춤을 매개로 하여 조커는 디오니소스의 모습과 겹쳐진다. 니체는 욕망의 디오니소스와 이성과 빛, 질서와 균형을 추구하는 아폴론 사이에서 디오니소스에 집중했다. 디오니소스와 니체를 거쳐 조커로 이어지는 '폭력의 부조리함'을 아서는 벗어버리고 싶었다.
(10) 폭력의 부조리를 벗어버리고
아서가 자유의지를 발현하지 못할 때는 조커가 되어갔다. 그 계단에서 그는 춤을 추면서 조커로 변해간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빼앗겨서는 안된다. 폭력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발현하지 못하고 잠식당하게 만들어 부조리 속에 잠기게 만든다. 자유의지를 제대로 발현하면 아서처럼 조커의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중은 폭력에 약하다. 폭력의 부조리에 휩쓸리기 쉽다. 한사람의 희생양을 몰아서 폭력으로 죽게까지 만든다. 조커라는 영화에 열광했던 이들은 이제 그 망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11) 망상을 버리고
"너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너를 강하게 만든다. - F. 니체"
위와 같은 경구들을 가지고서 니체에게 열광한다. 조커에게 열광했던 대중의 모습이 또 다시 겹쳐진다. 부조리라는 시련에 의해서 스스로 광인이 되어버린 니체와 조커에게 위의 말은 해당되지 못한다. 이들을 죽이지 못한 시련이 아니다. 아서를 제외한 그들은 미쳐버린 채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삶의 열매는 살아온 노정의 결과와 같아서 결과를 통해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이제 니체는 조커와 같이 벗어 던질 망상이 되었다. 영화 '조커(2019)'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속편 '조커: 폴리 아 되(2024)'는 실망감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서가 조커라는 망상을 벗어버린 선택을 환영해야 한다. 아서는 망상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빠져나오는 모습 두 가지를 다 보여주었다. 우리는 조커가 아니다. 조커의 가면을 쓸 수는 있지만 조커가 될 수는 없다. 대신 아서를 조커로 만든 장본인들이다. 니체의 신화는 제2의 또 다른 조커를 만들어낸다. 어떤 선택으로 가야할 것인가. 신화 속 디오니소스와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희생양을 찾으러 춤을 추며 흘러갈 것인가 아니면 망상을 벗어버리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12) 조커는 없다
'조커: 폴리 아 되(2024년)'은 도입부에서 특이한 애니매이션으로 시작된다. 사실 이 짧은 영상에서 조커의 실체가 모두 드러나고 아서의 비극적 미래가 점쳐진다. 아서는 그림자 같았던 조커에게 덧입혀져 철저하게 이용당하다 끝에는 버림받고서 경찰봉에 무참히 맞아 핏빛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아서는 마지막 최종 진술(closing statement)에서 조커를 부인하고 벗어나지만 그의 운명은 이미 도입 영상에서 보여준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서: (최후 변론) 저는 이곳에 조커로 나오고 싶었습니다. 조커라는 이름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죠. 여러분을 탓하고 사람들을 탓하고 내 삶이 개 같은 이유를 찾고 하지만 이젠 못 하겠어요. 여러분이 바라는 모습은 다 환상이니까. 조커는 없습니다. 저는 저일 뿐. 저는 여섯 명을 죽였습니다. 돌이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해요. (중략) 저는 그저 다 날려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똑똑, 누구세요? 아서 플렉. 아서 플렉 누구요?'(조커: 폴리 아 되, 2024년)."
마지막 Knok Knok Jokes에서 조커라고 하지 않은 것은 아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최후 변론에서 '조커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할리 퀸(리 퀸젤)은 방청석에서 벌떡 일어나 조커를 바라보고는 떠나버린다. 조커를 우상으로 만든 자들도 함께 말이다.
(13) 아서의 노래
"죄수: 사이코패스가 바에 갔는데 유명한 광대가 혼자 앉아 있더래. 완전 취해서 바지까지 적신 채. '와, 여기서 만나다니. 근데 좀 실망이네요. TV에서 보던 광대가 취해서 오줌까지 싸고.' 그랬더니 광대가 그랬대. '이렇게 싸나 저렇게 싸나 싸는 건 똑같죠.' 사이코패스가 대답했대. '하긴...' 사이코패스가 말하길 '너 같은 놈은 죽어도 싸죠.'(조커: 폴리 아 되, 2024년)."
그리고서 아서는 죄수이자 사이코패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곧바로 이어지는 무대는 아서의 상상 속 장면이다. 더 이상 망상이 아닌 자신의 온전한 정신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아서의 노래: 내가 산을 쌓는 그날 그날이 오면 주께서 가브리엘을 보내 날 데려가시니. 자랑스러운 나의 아들이 날 대신하리라. 나의 아들이 지상 낙원에 남아 우리 주의 은총을 받으리라(조커: 폴리 아 되, 2024년)."
가브리엘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곧 예수가 태어날 것임을 알리러 왔던 천사이다.
(누가복음 1: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그런 가브리엘을 보내어 아서 자신을 데려간다고 한다. 아서는 자녀가 없다. 나의 아들은 누구일까. 아서가 산을 쌓는다는 것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기리라(마 17:20) 하셨던 말씀과 연결되어 아서가 주를 찾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그날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을 낙원으로 만들어 은총을 베풀게 된다는 의미다. 고담시는 아직 지상 낙원이 아니기에 미래에 있을 일을 말한다. 하지만 아서에게는 그날이 곧 육신을 벗는 날이 되고 말았다. 칼에 찔리면서도 아무런 저항하지 않는 양 같은 온순한 모습이었다.
(사도행전 8:32) ...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마치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서는 자신을 조커로 만든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희생하여 순교자에 가까운 죽음을 얻는다.
"아서: 나의 죽음이 나의 삶보다 가취 있기를(조커, 2019년)."
[이미지 출처:Daum이미지]
(14)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자를 사랑한 자
아서는 자기를 사랑해 줄 누군가를 끝까지 바랐다.
"아서: 내 생애 처음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났네(조커: 폴리 아 되, 2024년)."
하지만 할리 퀸은 조커를 벗어버리고 본 모습을 찾으려는 아서를 떠나 버렸다. 그래서 결국 아서는 예수님을 마지막 사랑의 상대로 삼았다. 왜냐면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던 자신을 끝까지 사랑해준 분이기에 그렇다.
(15) 사랑의 시작
니체는 광기를 벗어 던지지 못했지만 아서는 조커를 버렸다. 우리에게 입혀진 조커의 광대 복장은 무엇인가. 벗어버릴 용기와 결단 그리고 실천이 나에게 존재하는가. 우리에게 덧입혀진 광대 복장은 무엇인가. 니체가 남기고 간 유산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물은 인류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아서와 조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보았다. 니체의 망령은 할리 퀸의 모습으로 부활하여 아서에게 접근했다. 스스로 희생양이 되지 않고 디오니소스 앞에 아서를 제물로 바치려던 모습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얻은 교훈은 이성과 욕망을 저울질 하던 니체의 사고 실험은 끝났다는 점이다. 두 편의 조커 영화 시리즈는 단지 1980년대 고담시의 모습을 통해서 현실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서가 조커로 각성했다고 믿지만 그 반대이다. 그는 니체가 내세운 디오니소스가 상징하는 욕망과 폭력에 동화되지 않았다. 아서는 죽음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진정한 빛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스스로 했다. 괴테의 희극 ‘파우스트’에서처럼 ‘데우스(Deus, 신)’가 등장하지 않는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의 영Spirit이 갑자기 나타난 신에게 구원 받아 하늘로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었다. 아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 길을 간 것이다. 진리는 그에게 빛이 되었지만 그가 직접 빛으로 걸어 들어간 결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희생양을 원했던 이들은 아서가 조커로 남아주기를 바랐지만 디오니소스와 함께 니체는 시체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진리가 남았다. 조커는 아서를 이용했지만 끝까지 그를 차지하지 못했다. 아서는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고서 평온히 육신을 벗었다.
그래서, 이제 그의 사랑이 시작된다.
[이미지 출처:Daum이미지] <저작권자 ⓒ 제이에스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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