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훈련병 시절의 신앙생활]
내 20대 인생은 어떻게 살았나?' 그중에서 한 토막을 쓰려고 한다. 나만이 걸어온 길은 오직 나만이 그 역사를 기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나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같은 일들이라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때 쓴 일기장을 모두 갖다 놓고 확인하면서 쓰니 그나마 확실하게 쓸 수가 있어 다행이다.
∥논산 훈련소에서∥
1966년 2월 중순, 군 입대 영장을 받았다. 일주일 후 봄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새벽 5시에 부모님께 인사하고 집을 떠났다. 육군 훈련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인원 점검 후 사복을 군복으로 같아 입었다. 논산에서 전반기 6주 동안 정신 교육과 신병 훈련을 받은 후, 금마 훈련소로 가서 후반기 4주 훈련까지 받게 된다. 당시 내가 집에서 가지고 간 포켓용 신구약 합본 성정은 가로 6cm, 세로 10cm의 크기쯤 되는 것이었다. 지휘관이 쳐다보는 강한 눈을 피해 틈만 있으면 성경을 읽었다. 1시간의 심한 훈련이 끝나면 10분간 휴식이 있었다. 이때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라 대개 담배를 피우거나, 잠깐 누워 기지개를 켜며 피곤한 몸들을 풀었다. 간혹 어떤 병사들은 끼리끼리 모여 서로 낯설지만 고향을 물으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 순간 나에게는 성경이 너무도 소중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나 외에 그 아무도 없었다. 훈련을 하더라도 쉬는 시간에 성경 읽을 것을 생각하니 훈련이 고달픈 것도 몰랐다. 종일 훈련하고 취침 막사에 돌아가면 점호가 있었고, 밤 9시에 점호가 끝나면 취침에 들어간다. 그러면 불침번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작은 등불만 희미하게 켜 놓은 채 자게 된다. 취침 시간에는 모두 자는 것이 군 단체 생활의 방침이라, 책을 읽거나 개인행동을 할 수가 없다. 만일에 개인행동을 하게 되면 불침번 근무자의 제재를 받게 된다. 그 시간에는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자유가 없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는 자는 체하고 20분 누워 있다가 모두 고단해 잠이 들 때면 그대로 엎어져서 성경을 읽었다. 새벽 1시까지 읽으면 더 견딜 수가 없어 나도 몰래 성경책에 침을 홀리며 잠이 든다. 그렇게 피곤한 잠만 자고 새벽에 그대로 눈을 떠 또 성경을 읽었다. 한번은 불침번들이 나보고 무슨 책을 그리 재미있게 읽느냐고, 다 읽은 다음 자기에게 빌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성경책을 보았는데도 그것이 성경인 줄을 전혀 모르는 것을 보니 교회를 하루도 안 다녀 본, 신앙에 있어서는 일자무식의 병사인 것 같았다.
내가 불침번 근무를 서는 때는 성경 읽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1시간씩 근무를 섰는데, 어느 때는 성경을 계속 읽으려고 다음다음 사람까지 깨우지 않고 혼자 독점하며 불침번을 서기도 했다. 그러면 다음 날 병사들이 자기 불침번 근무 때 안 깨웠다고 너무 좋아하며 잠 잘 갔다고 고마위했다. 그러다 보니 으레 내 불침번 때는 2시간씩, 혹은 3시간씩 연속해서 근무하면서 성경을 읽었다. 내 다음 차례의 병사는 나를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 이야기도 해 주며 전도를 하여 군 교회에 같이 나가기도 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가는 사람만 제외하고 부대 전체가 작업을 했다. 화장실의 오물 퍼내는 일과 운동장에서 풀 뽑는 일들이었다. 일요일이면 일하기 싫어서 신앙생활을 안 하던 병사들이 교회에 간다고 하며, 군종(軍宗) 인솔자가 오면 20~30명씩 따라갔다. 이를 지휘관들은 화가 나서 모두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며 일절 교회에 못 나가게 방침을 세워 버렸다. 그래서 일요일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교회를 보내지 않았다. 일요일 일하기 싫어서 교회로 피신 가는 가짜 신앙인들 때문에 정작 교회에 다니는 나까지 못 가게 된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도 작업장에 끌려가 종일 풀 뽑는 일을 하면서, 다음 주 일요일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정말로 교회 다니는 병사들은 우리 부대에서는 7명뿐이었다. 한 주간 훈련을 받고 또 일요일이 돌아왔다. 나는 아예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일찍 군 교회로 빠져나가 버렸다. 아침 주일예배를 드리고, 또 기다려서 일요일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돌아가기로 했다. 공백 시간에 성경을 읽었다. 하루가 천국 시간같이 너무나 빨리 가 버렸다. 금방 저녁예배 시간이 되어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마지막 주기도문을 압송하며 예배를 폐하려는 순간에 누가 내 목덜미를 잡으면서 끌어당겼다. 주기도문을 외우다 중간에 눈을 떠 보니 누가 나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니, 기도하는데 왜 이래요? 기도가 끝나거든 이야기해요."'라고 했다. 그러나 무조건 잡아당겨, 애처롭게도 그 짧게 남은 주기도문을 못 외우고 말았다. 밖에 끌려 나와 보니 나의 중대 소속 선임하사였다. 다짜고짜로 왜 탈영했느나고 다그친다. 누가 탈영했느냐고 물으니 "너, 탈영했다고 부대에서 모두 찾고 있는 중이다."라고 했다. 나는 "무조건 교회에 안 보내 줘서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교회에 왔을뿐이지 훈련소 철조망 밖에 나가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예배가 끝나고 나온 지도자들이 모두 이 광정을 보고는, "예배드리러 다니는데 무슨 탈영이냐?" 하고 한마디씩 했는데, 그중 한 장교는 다음에 그런 일이 없도록 하고 잘 좀 해 주라고 했다. 곧 소속 부대에 돌아왔다. 부대 전체가 각 내무반에서 기합들을 받고 있었다. 내가 속한 내무반에서도 차렷 자세로 기합을 받으며 훈시를 듣고 있었다. 나를 끌고 들어가 내무반 중간에 세워 놓고 중대 서무계(행정병)와 선임자가 뺨을 때리며 군홧발로 차고 조인트를 까는 등 한참을 정신없이 때렸다. 기합을 받는 자들이 "저 새끼 더 때려야 된다."라고 소리를 질러 댔다. 코피가 나고 불이 화끈거리며 앞정강이는 너무 아팠다. 그러면서 다시는 교회에 가지 말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교회에 안 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만 다음에는 이야기를 꼭 하고 가겠다고 했다. 또 간다고 하니 또 때렸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부대 교인들은 일요일이면 다 교회에 보내는데 왜 우리 부대만 안 보내줍니까? 진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파악해서 보내 줘야 하는게 원칙이 아닙니까?" 했다. 그쯤에서 나의 기합은 끝났다. 교회를 갔기 때문에 책망만 간단히 듣고 끝날 줄 알았지 이렇게 심하게 맞을 줄은 미처 몰랐다. '아, 군대란 이렇구나.' 하며 내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합이 끝났을 때 내무반 훈련 동료들은 내가 맞은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기도 하고 일부는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욕을 하기도 했다. 그중의 어떤 사람은 "너, 군대 들어오기 전에 어느 교파, 어느 교회에 다녔니?"라고 묻는다. 장로교, 석막교회에 다녔다고 하니, 석막리가 어디에 붙어 있느나고 한다. 충남 금산이라고 하니, 자기는 영락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같이 알고 지내자고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엔 중대장실에 있는 서무계가 나를 부른다고 해서 갔다. 전날 나를 때리고 혼낸 사람들 중 인원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자였다. "어제는 군 법칙상 손을 댄 것이지,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다. 미안하다."라고 말하면서 군에 오기 전에 어느 교회에 다녔느냐고 묻는다. 시골에서 석막교회를 다녔다고 했다. 직책은 무엇이었느냐고 하기에, 주일학교 부장직도 하고 청년부도 맡아서 일을 하다 군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서무계는 실상 자기도 교인이라고 말하면서 임무 때문에 교회에 못 나가고 있다고 했다. 교인이라고 하니 참 반가웠다. 그는 내게 말하길, 다음 주부터는 우리 중대 자체 군종 병사가 되 어 진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만 확실하게 파악해서 일요일에 교회로 인솔해 갔다가 같이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인원 전체가 아무 이상 없는지 자기에게 보고하고 소속 부대로 돌아가라고 했다.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한테 이야기하라고 했다. 옆의 직무 책상에 앉아 있던 중대장이 그를 보고 "야, 김 병장, 서무계 끗발 좋구먼."하고 웃는다. 그리고 나를 처다보면서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했다. 그날부터 중대 전 훈련병들 중에서 진짜로 교회 다니는 사람만 선별하여 일요일 날이면 교회로 인솔하는 중대 자체 내의 군종 인솔 병사가 된 셈이었다. 그다음 일요일에 교회 갈 사람을 찾으니까 몇 명 안 나왔다. 그들은 내가 교회 가다가 맞은 것을 보고 모두 두려운 모양이었다. 교회 가겠다고 나온 병사들은 사회에 있을 때 진짜로 교회를 다닌 사람인지 하나하나 파악해 보았다. 주기도문은 모두에게 기본이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도 암송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 진짜로 교회 다닌 것이 아니라고 하니, 어느 사람은 영락교회에 나가다 군대에 왔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서울의 이름 있는 교회 이름들을 됐다. "큰 교회에 다녔으면 뭐 하냐? 잘 믿었어야 되지."했다. 그날은 전 중대 내에서 7명만 인솔해서 교회를 갔다 왔다. 갔다 와서 서무계에게 보고하니까 “내가 보니 진짜들만 갔다온 것 같다.” 하면서 이 사람들을 일요일마다 인솔하라고 했다. 그리고 “더 파악을 해서 정말 교인들이면 네가 알아서 데려가도록 해라. 네게 맡긴다.”라고 했다. 그다음 주부터는 교회 나갔던 자들이 자기 내무반의 교인들을 자세히 파악하여 같이 가도록 했다. 그래서 그다음 일요일에는 20여 명을 데리고 나갔다. 그랬더니 남은 사람들도 모두 평소에 교회에 안 다녔던 것을 후회하면서 지금부터라도 교회에 나갈 수 없느냐고들 했다. 그중에서 정말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데리고 나갔다.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 훈련소에서 전도도 하고 정기적으로 교회를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혼자 산에서 기도 생활을 하고 사회생활 할 때는 소외감을 받고 살았기에 군대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개 이야기를 피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노방 전도를 하던 습관이 있어 이야기를 잘하는 편이었다. 훈련 중에 1시간 훈련이 끝난 후 주어지는 10분 휴식 시간이 되면 나는 성경을 읽든지, 아니면 교관이나 훈련 조교한테 찾아가서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고 고향을 물으며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훈련병이 감히 이야기를 해?' 하는 식으로 대했지만 나중에는 은근히 좋아했다. 훈련 시간에는 으레 무섭게 독기를 부리면서 훈련을 시켰지만, 그들도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쯤이라 훈련소의 훈련이 참 엄하고 무서웠다. 굉장히 강하게 했다. 모두 심리적인 불안감에, ‘명령 복종’이라는 단어 아래 훈련 시간만큼은 정신일도 하였다. 그중에 간혹 말을 조금 거슬리게 하든지 행동에 이상이 있으면 시범적으로 맞기 일쑤였다. 맞는 것을 보면 더 무서워 병사들은 속까지 떨어 됐다. 그러나 나는 집에서 일하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즐겁고 재미가 있었다. 지휘관과 인사를 하고 지내니 그가 하는 행동이 무섭지가 않았다. 당시 훈련을 받으면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일이 있다. 기합 받은 일이다. MI 250m 사격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머리를 땅에 처박고 엎드려 양손을 등에 얹은 채 ‘원산폭격’이라는 무서운 기합을 받았다. 시간은 15-20분 동안으로 기억된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고, 다시 넘어지면 군홧발로 차이곤 했다. 이 기합은 나뿐만 아니라 많이들 받았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결심하고 사격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열심히 배우고 연구했다. 그 후 성적이 좋아져서 사격으로 기합 받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전방에 배치되었을 때는 카빈총 특등 사수가 되어 훈장도 받았다. 앉아쏴, 서서쏴, 엎드려쏴 경기에서 100점 만점에 95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파월되었을 때 저격수 임무를 맡았다. 군대에서는 제때 밥을 주고, 옷을 주고, 또 사회에 있을 때 호기심으로 쏴 보고 싶었던 총도 주어 다루게 하고, 몸도 단련시켜 건강해지니 좋았다. 누구는 고향 생각이 난다고 했지만 나는 고향에서 산(山)기도 생활이나 농사일로 고생을 많이 했기에 오히려 훈련이 편했다. 그때는 1960년대라 가정도, 국가도 생활 형편이 어려운 때였다, 고로 군대에서도 먹는 식사량이 참 적었다. 다들 시골에서 일하느라 많이 먹던 위장이라서, 군대 정량만으로는 너무 배고파 했다, 어떤 병사는 쓰레기장을 뒤져서 식당에서 나온 무쪽을 주워 먹기도 했다. 나는 금식을 많이 하던 몸이고 또 가난으로 인해 배를 곯다가 간 몸이라 그렇게 미친 듯이 무쪽을 쓰레기장에서 주워 먹어 본 일은 없다. 그때 군대 밥은 한 공기였고, 그것도 거의 보리밥이었다. 쌀은 10분의 1 정도였다. 밥한 공기가 몇 수저 먹다 보면 없어졌다. 반찬은 국 한 공기하고 깍두기나 김치였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지금 어떤 진수성찬의 맛과도 비교가 안 되었다.
∥금마 훈련소에서∥
또 군대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은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다. 모자나 손수건, 밥그릇, 군에서 지급된 물건들이 소대 내무반 내에서 자주 없어져 늘 불안감에 사로잡혔었다. 한 사람이 잃어버리면 그것을 채우려고 서로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못하면 돈으로 배상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전반기 훈련으로 6주를 끝마치고 특수 병과가 아니라서 전북 금마로 이동해 후반기 훈련을 4주간 정도 또 받게 되었다. 내가 대학교를 못 나와서 또 훈련을 받는 것으로 생각할 때 마음이 착잡했다. 모두 못생기고 못 배운 자들만 또 훈련을 받으러 온 것 같았다. 후반기 훈련도 참으로 강했다. 여기서도 사물들을 서로 훔쳐가 모두 자기 물건 챙기느라 잠도 못 잤다. 처음 들어올 때는 모두 다 있었는데 가다가 없어지는 이유는 병사들이 훈련에 다 나갔을 때 내무반의 책임자들이 도둑질을 해 가기 때문이었다. 잃은 것을 못 채우면 돈으로 지도자들에게 배상하도록 해서 돈을 갈취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것이 없어졌으면 자기가 배상하지 않으려고 또다른 사람의 것을 도둑질했다. 그렇게 연세 반응이 일어나 소대 내무반은 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훈런받고 돌아오면 꼭 자기 사물을 먼저 확인한다. 그래서 무엇이 없어졌으면 재빨리 옆의 사람 것을 갖다 놓는다. 그런 모습들을 여러 번 직접 보았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보고 자기 물건 누가 가져가는 것을 못 보았느냐고 물을 때 나는 알고도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나는 확실히 모르겠다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한번은 그날 밤 9시 점호 때 사물 점검이 있으니 모두 준비해 놓으라고 했다. 나는 사물이 모두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저가 없었다. 너무 충격을 받고 샅샅이 다 뒤져 보아도 없었다. 옆에서 "너는 무엇을 잃어버렸냐?" 하기에 소리를 지르면서 수저가 없어졌으니 누가 수저 갖고 있으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남는 것이 없다고 했다. 실상 뭘 잃어버리면 자기만 알고 있다가 남이 잠잘 때나 화장실 갔을 때 슬쩍 훔쳐 와야 되는데, 나는 광고하고 동네방네 떠들어서 남의 것도 훔칠 수가 없게 되었다. 모두 재촉하며 어서 철조망 밖에 나가서 사오라고 했다. 먼저 예비 검열 때, 내무반장이 사물 없는 사람 나오라고 해서 내가 나갔더니 빨리 채워 놓으라고 했다. 어디 가서 사오든지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몇 대 따끔하게 때렸다. 너무 당황되고 긴장이 되어 틈을 타서 군대 교회로 뛰어갔다. 군종 목사를 찾아가 "오늘 밤 9시 점호 때만 사용하고 가져올테니 수저 하나만 빌려 주세요. "라고 했다. 내가 주일마다 교회 다니는 것을 군목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군목은 "야, 이놈아. 수저 빌려 주면 나는 손으로 먹게?" 하고 안 된다고 했다. 갖은 사정을 해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럼 하나만 팔라고 했으나 여유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럼 하나 구해 달라고 하니 어디 가서 구하느냐고 했다. 대위 장교 목사님이니까 점검 점호를 안 하는 부대 교인한테 이야기 좀 해 달라고 했다. 한참을 이 사정 저 사정 알아들을 만큼 이야기했으나 그는 사정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하며, 별것도 아니니까 그냥 없어졌다고 하고 때리면 몇 대 맞고 말라고 했다. 정말 야속하고 인정머리 없는 군종 목사였다. '아니, 군종 목사가 자비가 이리도 없고, 긍휼이 이리도 없을까?' 자기 교회의 교인을 대하면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풍기기는커녕 무정의 냄새만 물씬물씬 풍겼다. 희망을 품고 달려간 발걸음과 날아갔던 몸은 그만 좌절하여 축 처졌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그때 나는 이런 지도자나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하여 잃어버린 것이니 내 잘못으로 돌리고 말자.’ 하고 생각하며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날 온종일 무엇을 했는지 생각이 잘 안 난다, 회미하게 기억이 나서 영감으로 생각해 보니 9시 점호 준비를 온종일 한 것 같았다. 드디어 밤 9시가 되었다. 나는 체념하고 점검에 임했다. 모두 이상이 없고 나만 수저가 없었다. 결국 나는 수저 없이 사물 검사를 받있다. 그래도 큰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작은 물건인 수거를 잃어버려서 다행이었다. 온 내무반이 다 어떻게 채웠는지 물건을 다 채웠는데, 나만 못 채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무반장이 때리지도 않고 어서 체위 놓으라고 하면서 끝냈다. 내무반장은 내가 무엇을 잃어버려도 남의 것을 훔쳐 채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때리지 않고 몇 마디 말만 하고 만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결국 수저를 채워야 하니 ‘이것을 어디 가서 구하나?’하고 고심하며 성경을 보다가 군복 상의를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기상해서 일어나 보니 좌측 가슴이 너무도 저리고 아팠다. 성경을 보다가 훈련복을 입은 채로 수저 생각을 하며 잠이 든 것이었다. 수저가 없는 것을 지휘관이 봐준다고 해도, 밥을 먹을 수 없기에 당장 문제여서 더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가슴 통증이 심해서 왜 이러지? 이상하다. 마룻바닥에 무슨 물체도 없었는데….' 하고 생각하며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좌측 포켓에 손을 넣어 보니 내가 찾던 수저가 나왔다. 너무나 황당무계했다. 아니, 이놈의 수저, 그렇게도 찾을 때는 어디에 가 있고 그런데 왜 내가 포켓에 수저를 넣었지?'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내무반 안에서 물건을 너무 훔쳐 가니 아예 못 훔쳐 가게 밥을 먹은 후 내가 수저를 싸서 포켓에다 넣고 다닌 것이었다. 안 잃어버리려고 안전하게 한다는 것이 지나치게 되었다. 이후에 생각해 볼 때, 이 사건은 내 인생을 성자가 테스트한 것이었고, 너무 염려되어 지나치게 한 것은 나의 잘못임을 깨닫게 되었다. 수저를 찾았다고 내무반에 보여 주면서 말했더니 바로 고문관 취급을 하기도 하고 개중에는 "정말 교인이라 남의 것을 안 훔쳐 가는 양심적인 사람이구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 있다가 충남에 사는 병사가 야전삽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 야전삽은 경상도에 사는 병사가 홈쳐 갔었다. 야전삽을 잃어버린 병사가 그것을 눈치 채고 자기 것이 틀림없다고 싸움이 붙었다. 충청도 병사는 말이 느리고 말을 더듬는 반면, 경상도 병사는 말이 빠르고 고함을 잘 쳤다. 말로는 경상도 사람이 이겼지만 실상 그 삽은 충청도 병사의 삽이 틀림없었다. 결국 내가 "저것은 아무개 삽이 맞다."라고 했다. 그가 슬쩍 가져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나는 큰소리로 "'네가 가지고 갔잖아. 깜깜한 밤에 가져갔으면 나도 못 보았을 것인데 아까 환한 낮에 가지고 갔으니 내 눈에 안 보이겠나? 같은 내무반 것 가져가지말고 다른 데서 가져와 채우든지 해야지."라고 말했더니 수그러진다. 충청도 병사는 말을 빨리 못 해 말로 지니까 나중에는 쫓아가 야전삽으로 그의 등을 내리쳐 버렸다. 모두 잘 때렸다고 했다. 결국 삽을 주인에게 돌려주고야 말았는데, 훔친 병사도 자기 것이 없어져서 화나서 남의 것을 갖다 놓았다고 고백했다. 한번은 내무반장이 못을 하나씩 1시간 내에 구해 오라고 전원에게 명령했다. 훈련소 안에서는 정말 못을 찾을 수가 없었다. 누구는 사용하는 못을 박아 놓은 곳에 가서 몰래 빼 가지고 왔다. 나는 그렇게는 할 수가 없어 오물장에 가서 철사를 찾았다. 철사를 끊어서 말아 못대가리같이 만들고, 끝은 시멘트 콘크리트에다 문지르며 뾰족하게 갈아서 못같이 만들어다 주었다. 부대원들 중 반쯤은 못을 가져왔고, 반쯤은 그냥 돌아왔다. 못을 못가져온 사람들은 즉흥성이 없고 요령이 없다고 모두 기합을 받았다. 반면, 못을 가져온 자들은 임무에 충성했다고 용감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내 것을 보자 "못이 아닌데 못으로 만들었네." 하며, 즉흥성과 요령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요령이란 요리조리 빼고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는 삶도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섭리역사에서도 요령과 즉흥적 대처 능력이 있어야 한다. 어느 날은 "사회에 있을 때 옷을 다려 본 사람 있냐?" 해서 손올 들었다. 손 든 사람들을 확인해 보니 보통 세탁소에 근무하거나 세탁소를 운영했던 사람들이었다. 나도 웃을 많이 다려 보았다고 했다. 어디서 했느냐고 물어서 월명동이라고 대답하니까, 앞글자를 못 알아듣고 명동인 줄 알고 나오라고 하여 나를 포함해 6명이 인솔자를 따라갔다. 많은 옷들을 보이며, 며칠 있으면 이 옷들을 입고 배출대로 가서 전방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나는 사실 웃을 다려 본 일이 많지 않아 은근히 떨렸지만 막상 가서 해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700벌 이상을 다림질했던 기억이 난다. 훈련 안 받고 좀 편하게 지내러 손을 들었던 것인데, 온종일 그 좁은 군대 세탁소 안에서 한증막 신세로 비지땀을 흘리면서 고생을 했다. 그런데 결국은 내가 하는 것이 서툴다고 개수나 파악하라고 해서, 나중에는 다림질을 하지 않고 그리했다. 3일 후 그 옷을 입고 신고하고 배출대로 떠났다. 그때 좋은 장소로 가게 해 달라고 그리도 기도했던 것이 생각난다. 결국 강원도 103보로 배출되었다. 강원도 보충대에서 대기하다가 백마 부대에 소속되어 경기도 양평으로 가서 훈련을 또 받았다. 알고보니 그것은 파월 훈련이었으며, 나는 파월 장병으로 차출되어 1966년 8월 30일에 베트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훈련병 시절에는 일기를 제대로 쓰지 않아, 정말 이만큼 쓰기도 힘들었다. 생각이 안 나서 밤새 기도하고 수십 년 전의 일을 영감으로 받아 그 실상을 생각하며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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