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2021.09.08.) 허은령
사랑하는 아들!
이른 새벽, 생명의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는 언제나 보람되고 기쁘다. 이어지는 아침 운동은 흘린 땀방울만큼이나 몸과 마음을 가뿐하게 만들어주지.
오늘 아침엔 지렁이를 통한 만물계시로, 걷는 내내 생각이 깊었단다. 101동 뒤편 작은 화단 사이에 난 좁은 오솔길과 밤새 차량 통행이 없어 조용한 주차장에는 작은 나뭇가지인가 싶어 자세히 보면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지렁이들이 여러 마리 보인다. 그들이 삶의 터전인 흙을 빠져나와 딱딱하고 위험한 포장도로 위를 기어가는 모습이 참 딱하고 안쓰러웠다. 깨끗한 듯 보여도 작은 모래알갱이와 먼지가 깔린 시멘트와 아스팔트 위에서 말랑하고 촉촉하고 윤기 있는 가녀린 몸은 따끔따끔한 모래먼지를 덮어쓰고 알지 못하는 길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그들을 밟지 않으려고 피해 걷느라 가끔씩 투스탭을 밟기도 하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가 생각났다. 땅바닥과 굴이 자신들의 터전인 그들에게 인간의 발자국은 괴물이요, 전쟁이요, 페로몬을 뿌리며 대항해야할 긴급 상황이었겠지. 오늘 길 위의 지렁이들도 빠르고 거칠게 땅을 밟아대는 내 발걸음으로 인해 그러한 공포를 느꼈으리라.
문득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인생도 저런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기쁨을 누리며 편히 살아갈 길을 예비하고 알려주셨는데도 그 끈을 붙잡지 못하고, 하나님 생각이 아닌 자기 생각대로 험난한 세상에 나가 갖은 고생과 환난을 겪으며 때로는 위험에 처해 뜻밖의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기도 하니까.
하나님 주관권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쁨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라 안타깝고 속상했다.
기름진 흙 속에서 흙을 더욱 기름지게 분해하며 자기 일에 충실한 굵은 지렁이처럼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속에서 영육으로 성장하며 차원을 높여가는 신부의 삶이 최고의 삶임을 깨닫게 되었단다. 구름에 가려졌다 나왔다 하는 아침 해와, 까치의 경쾌한 지저귐, 지렁이 한 마리, 거미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감동되지 않는 만물이 없었고 감동 받을 수 있음에 또다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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