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리가 증명보다 크다[2부]

2부 신의 존재를 증명하라

jsmagazine.net | 기사입력 2024/02/20 [16:00]

[칼럼]진리가 증명보다 크다[2부]

2부 신의 존재를 증명하라

jsmagazine.net | 입력 : 2024/02/20 [16:00]

2부 신의 존재를 증명하라

JS매거진 편 집 부

 

▲     ©jsmagazine.net

 

1부에서 알게 된 것은 증명으로 진리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진리는 증명으로 다 나타낼 수 없고 진리는 증명보다 넓다는 뜻이다.

 

(1) 진리는 하나님이신가

 

(요한복음 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

 

예수님께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물었던 질문이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진리는 말씀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결국 진리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를 반박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2) 니체의 말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해석이지 원전이 아니다(F. 니체, 선악의 저편, 22).”

 

니체의 말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원전은 ‘Text’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의미상 자연의 본질자체이고 자연법칙은 여러 현상들을 실험과 증명으로 규정한 해석이 맞다.

자연을 해석한 법칙이 자연을 모두 기술할 수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이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학계에서 이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서 이미 '끝장난' 문제를 물리학에서 다시 반복하여 재확인한 경우이다.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었다는 말을 듣는 호킹은 그러한 평가에 걸맞게 아인슈타인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 연구했던 대통일 이론(Grand Unified Theory)이 완성되면 우주의 시작에서 신이 개입할 부분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티븐 호킹은 빅뱅 직후의 우주 상태를 연구하면서 알려진 모든 상호작용을 하나로 융합하여 하나의 대통일이론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중략)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이론이 있어 세계가 스스로 설명되어 버리면, 창조자로서의 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호킹의 진심이었다(한스 큉,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실제로 호킹은 그의 저서 '위대한 설계'에서 초끈 이론의 하나인 M이론이 대통일 이론의 유력한 후보라고 생각했다.

 

“M이론은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는 우주의 모형이 될 것이다. 다른 일관된 모형은 없으므로,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는 우주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M이론은 아인슈타인이 발견하기를 원했던 통일이론이다(‘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

 

▲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그리고 호킹이 기대한 노력의 결과는 러셀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10년간 애를 썼으나 결국 괴델에 의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간 것과 같은 상황이다.

 

"오늘날 호킹은 이렇게 본다. ‘증명할 수 없는 수학적 결과가 있다면, 예측할 수 없는 물리적 문제도 있다. 우리는 우주를 밖에서 바라보는 <천사>가 아니다. 우리와 우리의 모형들은 우리가 기술하는 우주의 일부다. 물리학 이론도 괴델의 정리처럼 그 자체에 적용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모순적이거나 불완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Gӧdel and the End of Physics(한스 큉,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호킹도 물리학의 끝End of Physics’이라고 말했다. 폰 노이만이 끝장났다고 말한 것과 같은 입장이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증명할 수 없는 수학적 결과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서 '끝장난' 수학 기초론을 뜻한다.

애초에 자연법칙으로 신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접근부터 잘못된 것이다. 증명이 진리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호킹이 우주 밖에서 내려다보는 <천사>에 대해서 말한 부분을 주목해본다. 괴델의 불완전성정리의 한계를 넘을 중요한 아이디어가 우주라는 체계 밖에 있는 천사와 관련이 있다.

 

▲ 이미지 : Daum  

 

(3) 단지 끝장난 것만은 아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발표되었을 때 당시 수학자들이 처음 느낀 감정이 끝장났다였고 호킹이 느낀 물리학의 끝이라는 생각처럼 거기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이성의 한계로만 마무리되는 슬픈 결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영이 있기 때문에 우주를 넘어선 초월적 존재인 신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을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우주라는 체계의 불완전성을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우주라는 차원과 한 차원 높은 n+1의 차원이 바로 영적 세계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인간이 추구해오던 논리의 최정상에서 논리적으로 그 한계가 증명된 사건이다. 그렇다면 괴델의 정리는 단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인가? 불완전성 정리에는 또 다른 차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한 것 자체가 이미 인간 인지능력의 한계만이 아니라 그 한계를 알 수 있는 인지능력을 입증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일정한 한계를 알고 있다는 것은 한계를 모르고 있던 상태와 비교하여 더 높은 차원이 있음을 의미한다. 괴델은 이미 1931년 논문의 각주(48a)를 통하여 고정된 시스템에 새로운 증명과 공리를 추가함으로써 고정된 시스템의 결정불가능한 명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시스템의 무모순성을 확보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Kurt Gödel, Kurt Gödel Collected Works Vol.I: Publications 1929-1936, p.181.](현우식, '과학으로 기독교 새로 보기')."

 

자신이 속한 체계 밖에서 주어지는 정보가 불완전성을 해결하게 해준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증명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에 보다 온전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증명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보다 차원 높은 완전한 체계가 지금의 현 차원의 체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증명은 진리를 포함할 수 없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의 의미를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현 단계 차원의 불완전성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새로운 증명과 공리를 추가하여 결정불가능한 명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해서 현재 차원에서 불완전성정리에 의해서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존재하게 되는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지금 단계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해결한다는 것이다.

 

"T(k)k차원의 시스템이라면, 2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T(k)에서는 그 자체의 무모순성이 증명될 수 없다. 그러나 T(k)가 새로운 공리와 증명을 추가함으로써 상위 k+1차원의 시스템이 되면 T(k+1)에서는 T(k)의 무모순성이 증명될 수 있다(현우식, '쿠르트 괴델의 수학적 신학:불완전성 정리, 무한, 하나님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

 

그러니까 단지 '끝장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4) 창조주의 창조주 문제

 

위의 인용문에서 계속 이어지는 문장을 보기로 한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제2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T(k+1)k+1차원으로서의 자체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 증명 불가능한 문제가 새로 생긴 셈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시스템 T(k+1)은 새로운 공리와 증명을 추가하여 k+2차원의 시스템 T(k+2)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무모순한 시스템 T가 이 무모순성을 증명하는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연속적으로 높은 차원의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현우식, '쿠르트 괴델의 수학적 신학:불완전성 정리, 무한, 하나님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

 

여기서 현 단계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또 그 다음 단계 차원에서 불완전성이 또 생길 것이고 인용문처럼 k+1차원에서의 '증명 불가능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k+2차원으로 올라가야 하고 연속적으로 높은 차원이 필요한가의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지적은 이런 것이다.

 

신이 무()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답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하려면 당연히 그렇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칼 세이건, ‘코스모스’).”

 

그러니까 '창조주의 창조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역시 괴델의 정리에서 k차원의 증명 불가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1차원에서 정보를 받아들이지만 또다시 k+1차원에서도 불완전성을 갖게 되므로 k+2차원에서 받아와야한다는 의미와 같다. 끝없이 '창조자의 창조자의 창조자의 ... 창조주는 누구인가?' 이런 무한순환이 반복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일단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은 아주 깔끔하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창조주의 답변은 이미 정해져 있다. 창조주를 창조한 존재는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 차원에서 이해할 만한 부분들을 더 찾아보기로 하자.

 

▲     ©jsmagazine.net

 

(5)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에게 묻는다

 

다시 러셀로 돌아가본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과의 이미 그 당시에 이와 비슷한 문제를 논쟁하다가 한 차원 더 높은 차원의 메타언어(meta language)로 해결할 수 있다고 제시했지만 결국 그 메타언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메타언어를 정의해야 하고 그것을 반복해야 한다는 지적을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받게 된다.

 

"[비트겐슈타인] '또 그 소리군요. 더 높은 언어(메타언어) 따위는 없어요! 진리는 오로지 한 가지뿐이에요.'(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외, '로지코믹스')."

 

나중에 러셀 역시 이를 시인하면서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우리는 그 거북이 발을 디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려고 애썼어요. 그런데 결국 성취한 것은 아래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북들의 탑이었습니다.’ - 버틀런드 러셀(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외, '로지코믹스')."

 

인도 신화에서는 우주를 거북이 등 위에 있는 네 마리의 코끼리가 떠받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수학의 기초, 토대를 확립하기 위해 한 차원 높은 단계의 메타언어를 도입하는 것은 거북이 등 위에 거북이를 반복해서 쌓아올리다가 끝없는 탑을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증명할 수 없는 참인 명제는 그 체계 안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증명된다.

이 문제는 이미 수리논리학 분야에서 고민하고 답을 찾아놓았다.

창조주의 창조주는 한 단계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차원에서 창조주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괴델의 정리에 의해서 실패한다. 그러면 다음 차원에서 증명에 성공하지만 창조주의 창조주 문제와 같이 그 다음 차원에서도 증명할 수 없는 참인 존재가 반드시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증명으로 증명을 거듭하려는 무한 루프(반복)에 빠지게 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 쿠르트 괴델(Kurt Gödel)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정언명제를 말하였다. 경험적으로 살펴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창조주의 창조주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끝까지 증명으로만 해결하려는 생각에서 마주하게 되는 순환의 연속이므로 증명할 수 없지만 참인 명제라는 것을 알면 우리 세계를 초월한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창조주는 참이므로 진리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세계의 창조주를 또 증명하려는 시도는 단지 증명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겠다는 고집일 뿐이다. 거기서부터는 <침묵>해야 한다.

우리의 우주 안에서 생기는 모순은 한 차원 높은 단계인 우주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창조주로부터 해결이 가능하다. 그 단계를 넘어서, 우주 밖 차원 다음 단계의 문제까지를 생각할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 창조주의 창조주 문제는 의미가 없고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창조주 차원에서도 충분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했던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명제를 잘못 이해한 빈 학파 학자들은 종교나 영적인 세계 등 과학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세계는 모두 '헛소리'라며 배제해야한다고 이해했지만 그들이 직접 비트겐슈타인을 초청하였을 때 그들은 심각하게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정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책의 핵심입니다(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외, '로지코믹스')."

 

초청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빈 학파의 학자들이 영적인 영역을 말하는 것은 헛소리라는 편협한 논리가 방향을 잘못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임에서 시를 읊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헛소리가 아니라 초월적인 영역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출처:Daum이미지]     

 

진리는 증명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역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모범적인 태도는 이와 같다.

 

"프레온가스 및 오존층 문제에서 사실에 대한 완전한 확실성을 얻을 수 없다는 우려는 중요치 않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지구에 사는 생명체가 태양 복사열에 튀겨지는 불상사 정도는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회의주의는 한켠으로 치우고 지금 가지고 있는 증거를 기반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업계가 제시하는 확실성에 대한 요구들은 무시하고 중심을 잡는 것이다. 철학자 흄이 말했듯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증거에 조화시킨다' (중략) 우리는 절대적 확실성을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릴 수도 없다. 오지 않을 것이 확실하니까. 우리에게 행동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행동은 우리가 믿게 된 대상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다. 이 점이 우리가 근거가 확실한 신념을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다. 생각해보면, 과학자들은 그동안 수많은 이론들을 폐기해왔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며 발전해왔다는 맥락에서 보면 그 이론들은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지구를 중심으로 한 예전의 태양계 모형은 항성과 행성의 위치를 정확히 예측했다. 우리는 지금도 뉴턴의 중력 법칙을 사용해 위성의 궤적을 계산한다. 그리고 뉴턴의 이론은 인류를 달에 보내는 데도 충분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현재 가진 증거를 바탕으로 최선의 신념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대부분의 상황은 그럭저럭 풀린다(케일린 오코너/제임스 오언 웨더럴, '거짓은 어떻게 확산되는가')."

 

이 긴 인용문의 핵심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여도 우리는 충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어 답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주의 창조주...’가 반복되어 거북이탑을 쌓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질문의 무한 반복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이 내가 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 창조주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창조주 신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신이 우리에게 주는 정보는 인간에게 충분한 정도이다.

우리 인간의 육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체계는 물질세계의 경계점이라고 볼 수 있는 우주이다. 우주를 한 체계라고 봤을 때 우리는 우주 안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창조주 신은 n+1, n+2, ... 이렇게 계속 차원을 높여서까지 인간에게 정보나 다른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주를 넘어선 차원인 영적인 세계 이상은 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창조주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역시 현학적인 단지 질문을 위한 질문, 의문을 제기하기 위한 의혹일 뿐이다.

 

 

(6) 뇌는 안테나

 

그런데 우리가 명확히 할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관측이나 측정을 통해서 만져지고 확인할 수 있는 육적인 물질세계에 한정을 지었다는 것을 넘어서 영적인 세계까지도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침묵해야 할 세계는 영적 세계를 더 뛰어넘는 그 다음 단계의 차원이다.

스티븐 호킹과 같은 무신론 과학자들의 오류와 한계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다. 스스로 한계를 지을 필요가 없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전능한 신이 정보를 제공하여 우주를 벗어난 영적 세계에까지 확장할 수 있게 해준다는 증거는 바로 성경이다.

성경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영적인 메시지를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여러 가지가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의 기록들은 단지 기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고 가르쳤던 대로 실제로 인간은 영을 가진 존재이며 그 영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감하고 계시를 받아 필요한 정보를 받아 뇌로 수신하여 느끼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지금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16. 만물을 보고, 하늘과 땅을 보아라.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이 오는지 보아라. 성자와 성령님의 말씀과 감동이 에 전해지며 온다(정명석 목사, ‘20131122일 새벽 잠언’).”

 

단지 뇌라는 수신기를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미국 소아과 의사이자 어린이 임사 체험 전문가인 멜빈 L. 모스 박사의 연구는 오른쪽 측두엽이 마치 송수신기처럼 작용하면서 기억을 보편적인 의식 창고와 연결해 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Melvin Morse, La divine connexion(신적 연결), Ed. Le Jardin des Livres, pp.61, 76-77.]. 이에 따르면, 뇌는 생각의 생산자가 아니라 단지 전달자일 뿐이며, 의식에 도달하기 위한 필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임사 체험 옹호자들은 임사 체험은 의식이 육체에서 분리 되었다는 사실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제시함으로써 의식은 뇌와 독립적임을 시사했다[주르당 박사가 미국 캘리포니아기술연구소에서 622일에 발표]. 이는 '이제까지 과학계가 받아들여온 개념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그러므로 뇌는 라디오처럼 송수신기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라디오가 고장 나면 아무리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한다 해도 그 소리를 내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파트릭 텔리에, '그곳에 빛이 있었다')."

 

라디오 안테나가 정확한 방향을 가리킬 때 더 잘 수신되듯이 뇌라는 수신기를 창조주 하나님 절대자 신에게 향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영적인 영감inspiration을 통한 계시를 잘 받아들이게 된다.

보려고 해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생각한 것만 보인다.

인식하지 않으면 뇌가 그쪽으로 향하지도 않고 동작할 수도 없다.

증명으로 입증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가능성을 0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차원 높은 존재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려고 할 때 실제로 영감을 얻어 불완전함을 극복하게 된다.

 

“13. <하나님과 성령님>과 통하면, ‘10년 동안 생각해도 못할 것을 순간에 깨닫게 해 주시고, 하게 해 주신다. 14. <신의 생각과 일체> 되면, ‘같이 생각하고 같이 행하게 된다. 16. <절대자 하나님>절대적으로생각하신다. 그 생각이 통하여 임하면, <신의 생각>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신이 행하듯행한다(정명석 목사, ‘202018일 새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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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과학이 가질 수 있는 오류의 가능성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저서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말했다.

 

"쿤의 주장처럼 패러다임의 변화로 실험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극단까지 몰고가면 쿤이 제시한 개념들은 몇 가지 급진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쿤 이전의 과학철학 연구 대부분은 과학을 세계에 대한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 탐구로 봤다. 그러나 쿤이 말한 대로 패러다임이 과학자들의 세계관을 구축한다면, 그리고 통상적인 증거 수집과 분석이 특정한 패러다임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이 같은 그림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 셈이었다. (중략) 쿤의 연구는 우리가 과학을 이해하려면 과학을 인간적 활동human enterprise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과학은 과학자들이 발전시키고 지키려했던 개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복잡한 역사와 풍부한 사회학적 특색이 포함된 활동이라는 것이다(케일린 오코너/제임스 오언 웨더럴, '거짓은 어떻게 확산되는가')."

 

과학은 역사와 사회학적 특색이 포함된 활동이라고 말한다. 다르게 말해서 인간적인 활동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의 지식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의 진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8) 신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은 따로 이 주제만 다루는 기회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는 증명이 진리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받아들인 정보가 그 차원에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상황을 마련해주는데 잘못된 이해로 인한 오해와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고 온전한 구원과 영을 올바로 형성하여 창조목적을 이루는 과정을 바른 방향으로 이뤄가는데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 자기 생각을 성자의 생각과 일체 시켜, 신의 생각을 통해서 차원 높은 것을 얻어 내는 것이다. 21. 상대와 같은 시간에 똑같이 생각하면 통하게 되는데, 대신 자기 마음·정신·생각의 차원을 높여야 된다. 23. 생각은 자기 뇌에서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있고, 외부에서 말하거나 생각을 보내어 느끼고 깨닫기도 한다. 46. 생각을 놀리지 않고 생각에게 성자의 일을 열심히 하라고 했더니, 생각이 성자를 만나서 하나의 잠언을 받아 와서 육에게 실천하라고 했다(정명석 목사, ‘2013523일 새벽 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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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다시 진리가 하나님이다

 

결국 호킹은 이미 진리가 곧 신이자 창조주 하나님인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의 이성을 통해 우주의 모든 비밀을 설명할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신은 인간 위에 초월적 위치에 있지 않고 인간이 그 자리에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 희망은 부서지고 말았다.

진리가 증명보다 크다는 주제를 통해서 우리는 진리가 곧 하나님이고 증명은 인간의 이성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라고 했을 때 단지 인간은 그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교류를 통해서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조차 위대한 이성의 힘이기는 하다.

이카루스는 밀랍으로 날개를 달아 태양 가까이 가려다가 뜨거운 열에 날개가 녹아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인간은 증명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내고 말았다.

진리가 증명보다 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증명으로 존재를 부정하거나 반대로 존재를 입증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이성의 도달점 위에 있다는 것이다.

 

3부에서는 이론을 증명해내는 방법 중의 하나로 실제로 행하는 실천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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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24/02/22 [09:30] 수정 | 삭제
  • "육신이 ‘자기 혼’과 통하려면, 뇌의 생각을 통해야 됩니다. 육신이 ‘자기 영’과 통하려면, 혼이 ‘자기 뇌의 생각’과 연결되어 통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생각은 육계와 영계의 다리 역할을 하고, 육 – 혼 – 영이 서로 통하게 하는 송수신기 역할’을 하고 삼위일체와 통하게 하는 송수신기 역할’을 합니다(정명석 목사, '2015년 8월 2일 주일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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