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이 걸어온 그 길(4)-정명석 선생님의 위대한 삶

jsmagazine.net | 기사입력 2024/10/13 [20:00]

나만이 걸어온 그 길(4)-정명석 선생님의 위대한 삶

jsmagazine.net | 입력 : 2024/10/13 [20:00]

나만이 걸어온 그 길(4)-정명석 선생님의 위대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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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역사월명동과 같다 : 개발하고 만드니 딴 세상

 

처음 섭리역사를 펼 때 밟았던 땅에 결국 섭리사 교회들이 세워지다

 

섭리역사도 처음에는 개발하기 전의 월명동 같았다. 차마 이야기를 못 할 정도었다. 떠돌아다니며 개인 삶을 살던 때에는 서울에서 1년에 아홉 군데를 이사 다녔다. 곳곳에서 청소도 해주고 각종 원하는 일을 해 주면서 그곳을 거처지로 삼고 살았다.

한동안 삼각산에서 기도하고 전도하며 살았다. 이 사람 저 사람 병을 고쳐 주고, 일반 복음에 해당되는 말씀을 전해 주었다. 아는 자들이 먹을 것을 주면 먹고, 기도하여 병을 고쳐 주면 밥을 줘서 먹고 살았다. 어느 날, 삼각산 기도원에서 알게 된 환자가 내 기도를 받고 고통이 없어졌다고 하며 헌금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것을 가지고 성북구 미아리 쪽 변두리 한옥집을 전세로 얻어 한동안 지낼 수 있었다. 그곳으로도 아픈 자가 수시로 찾아와서 기도해 줬는데, 그중 오류동 사람이 있어 그의 집에도 다니곤 했다. 그는 암 말기 환자였는데 병이 고쳐졌다고 감사하여서, 이 다음에 전세금과 합쳐 개척 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한때 한양대와 건국대 근처 화양리 쪽 큰 집에서 청소할 자를 찾는다고 해서 내가 신청하여 들어갔다. 그 집에 딸이 있었는데, 한양대 약대생이었다. 그 학생이 내게 말씀을 배우려고 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막았다. '삼분설'을 가르쳐 주면서 더 배우고 싶으면 내게 오라고 했는데 결국 아버지의 눈총 때문에 안 왔다. 그 집에서 한 달 정도 있다가, 정릉에 있는 그의 친척 집에서 아이 돌볼 사람을 찾는다고 하여 그리로 옮겨 갔다. 거기서 또 한달 있다가 다른 데로 갔다.

이런 식으로 이사하여 원남동, 증산동, 중곡동, 동대문, 명동 등 서울 시내를 안 다닌 곳 없이 거의 다 누비며 사방에서 한 달씩 살았다. 왜 그랬는지 깨닫고 보니, 서울에서 복음의 작전을 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지리를 먼저 익히게 하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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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병이 나은 사람들이 헌금한 돈으로 남가좌동으로 이사하여 교회를 만들었다. 그때 한 제자의 도움으로 나와 부모님이 살던 월명동 집을 35만 원에 사게 됐다. 하루는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오길, "서울 큰형이 목회하는 곳으로 이사하려고 한다. 네가 지은 집을 동네 사람한테 35만 원에 팔고 서울로 가려 한다." 하셨다. 이 말을 듣고 내가 집을 사겠다고 하니, 3일 안에 와야 된다고 하셨다. 만약 안 오면 집 팔고 가겠다고 하셨다. 이때 급한 마음이 들어서, 그 집은 내가 베트남 갔다 와서 지은 집인데 팔면 나는 어디에 가서 사느냐고 했다. 그리고 급한 마음에 감동되어서 밤새워 기도했다.

새벽에 전화가 걸려 왔다, 기도하는 중이라 안 받으려다 받으니, 교인 중 한 청년이었다, 선생님이 보고 싶은데 교회 가도 되느냐고 해서, 지금 철야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하니, "선생님은 사명이 그리 큰데 무슨 걱정이 있어 밤을 새워 가며 기도를 하세요?" 했다. 그래서 "사명이 크니 기도해야지. 가정에 관한 일이 있다. 기도 중이니 이만 끊자." 하며 전화를 끊고 계속 기도했다.

40년 전에 35만 원은 큰돈이었다. 지금 4000만 원 정도의 가치다. 그때 내 수중에 만 원도 없었다. 백지 막연한 기도를 했다.

그러던 중에 벨이 울렸다. 음성을 들어 보니, 아까 보고 싶어서 온다고 했던 그 청년이었다. 나는 새벽부터 별나게도 온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나의 사명으로 인해 나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새벽에 이같이 오는 날은 없었다.

문을 열어 주니 그가 하는 말이 "선생님, 무슨 걱정이 있어서 이같이 밤을 지새우면서까지 기도해요?" 했다. 나는 "고향 집에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살고 계신데 큰형이 서울에서 목회하는 곳으로 모시고 간다고 한다. 두 분 다 시골을 떠나시면서 내가 지어 준 집을 동네 사람에게 팔고 간다고 한다. 그것을 내가 사야 되는데 돈이 없어서 기도한다." 했다. 그가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 어서, "35만 원에 판단다. 시골 흙집이고, 땅도 200평이다." 했다. 그는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서 내 말을 듣고는 "35만 원짜리 집이 어디 있어요?" 하며 웃어 됐다. "350만 원이면 제가 사 줄게요. 선생님께 감사해서 제가 돈을 드릴 테니, 그 돈으로 사세요." 했다. 그러면서 400만 원을 수표로 주었다, 내가 "이런 거금은 필요 없다. 집은 35만 원이니까, 교통비까지 38만 원이면 된다." 했더니, 그냥 필요한 데 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수표를 돌려주고 38만 원만 받았다. 잘 쓰겠다고 고마위했더니, 그는 "돈이 필요할 때 꼭 이야기하세요." 했다.

이 청년은 내가 신앙을 지도해 주고 사업도 코치해 줘서 명동에 칼국수 식당을 차려 몇백만 원씩 벌고, 또 다른 일도 하여 많은 돈을 버는 자였다. 내게 돈을 주고는 "선생님 얼굴 봤으니 이제 집에 갈게요."하고 바로 돌아갔다.

 

▲ 월명동 야경     ©jsmagazine.net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과 성렁님과 성자께서 시대의 궁, 자연성전을 만드시려고 이같이 처음부터 집과 땅을 다른 사람에게 못 팔게 하신 것이었다. 고로, 이때도 예비하신 사람을 보내어 일사천리로 행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을 절대 뺏기지 않으신다.

이날 바로 어머니가 살고 계신 월명동으로 차를 타고 갔다. 기뻐서 날아가듯 했다.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정말 네가 살려고 이 집을 사려느냐." 하고 물으셨다. 당시 형제들은 다 고향을 떠나 각자 집이 있었다. 인석 큰형과 광석 작은형은 목회를 했고, 여동생 영자는 결혼해서 떠났고, 나머지 동생들 규석, 범석, 용석이도 생활 터전으로 아주 떠나고 없었다. 고향 집은 그나마 부모님이 살아서 겨우 관리가 되었다.

어머니께 돈 35만 원을 드리니, "중말거리 황 씨가 사서 농사 짓는 농가로 사용한다고 하여 그에게 팔려고 했는데, 결국 네가 사니 좋다." 하셨다. "사실 네가 지은 집이라 너 주려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팔아야겠더라, 큰형 집에 가서 쓸 돈도 필요하고 또 이사하려면 5만 원이 드니 누구에게든지 팔 수밖에 없다." 하시며 이해시켜 주셨다. "이제 이것은 네 집이야." 하셔서, 알았다고 했다.

이렇게 월명동 집터를 사 놓고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갔고, 한동안 남가좌동에서 지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성 신학교 졸업생들이 자기들끼리 단상을 차지하려 해서 나는 그 교회를 나오게 됐다 그 후에 하나님이 신촌으로 인도하여 19808월부터 이화여대 앞에서 본격적으로 시대 말씀을 전했다. 자리를 잡으려고 150군데를 돌아다녀서 방을 얻고야 말았다. 한 평이 안 되는 너무 좁은 방이라 4명이 겨우 않아서 말씀을 들었다. 이대 후문 쪽 봉원 사 마당에서 교리 도표를 펴 놓고 전도한 대학생들에게 성자의 재림을 가르치며 시대를 증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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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에는 삼선교로 옮겨, 쓰러져 가는 양로원에 자리 잡고 교회를 시작했다. 건물을 수리해서 예배를 드렸고, 선교에 박차를 가하여 많은 청년들을 전도했다. 경제적으로도 힘들고 이단이라는 악평의 소리도 들었지만, 어려움을 이기며 계속 말씀을 전하고 들었다.

그 후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 회관을 주일에 하루 2시간씩 빌려 그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다가, 명동 태멘소극장이 비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거기로 가서 3개월간 빌려 썼다, 그리고 독산동 가정집에서 한동안 섭리사를 펴기도 했다, 독산동에 사는 한 회원이 어머니와 같이 지내는데, 자기 집에 큰 집이 또 있다고 했다. 그가 부모님께 이야기해서 옆 건물을 쓰도록 허락받아, 그곳으로 이사해 6개월간 보냈다.

그 다음에는 배수빛 목사의 부모가 500만 원을 빌려 줘서 삼성동에 있는 건물 지하를 전세로 얻어 이사했다. 그곳 '영동 지하실 교회'40평으로 150~2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점점 청년들로 차기 시작했다.

이어서 종로구 구기동으로 이사하여 4층 건물을 얻었다. 거기 서는 4층과 옥상까지 활용하며 사용하였다. 생명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열렬히 전도하여 '구기동 세검정교회'에서 500~700명으로까지 성장했고, 지방 교회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고속터미널 근처 잠원동의 한 건물로 가서 전세로 있었는데, 바로 '영동교회'이다. 거기서 1000여 명이 되었다. 19877월까지 있다가 장소가 좁아서 또 봉천동으로 옮겼다. 그곳은 낙성대 지하철역에서 가까워 '낙성대교회'라 이름하였다. 낙성대교회에서는 4층 본당과 3층을 사용하였고, 의자 옆 통로와 각 층의 복도까지 짝 차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때 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주일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4부 예배를 드렸고, 초신자 예배를 따로 분리해서 드렸다. 그곳에 1991년도까지 있으면서 전국에 교회를 세워 나갔고, 섭리사는 부흥이 되었다. 당시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를 할 때 2만여 명이 관중석을 채우고 행사를 하였으니, 그때 약 5년간 10~15배 부흥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서울을 메주 밟듯 밟고 다니며 교회 역사를 일으켰고 결국 이 사연 있는 지역마다 현재 섭리사 교회의 성전들이 세워졌다.

서울에서 목회를 할 때 평창동에서도 살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조경에 실눈을 뜨게 해 주셔서 199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월명동 개발을 시작했고, 결국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야 말았다. 그 이후 하나님이 약속대로 집을 주셔서 나는 처음으로 전셋집을 면하게 되었다. 자연성전을 만들 때 고향에 청기와 지붕으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전국의 교인들이 월명동 자연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니, 섭리사 전체를 살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삭막한 골짜기였던 월명동을 개발하고 단장하여 이상세계로 만들었듯, 지난 40여 년 동안 섭리역사도 접진적으로 키위 오면서 이들과 땅에 최고 천국을 이루는 역사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후대들은 건물같이 되고 바다같이 된다

 

과거로 다시 돌아가면 젊어진다 하여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 살고 싶지 않다. 그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생각하니 끔찍하다. 수만 가지를 다시 겪고 싶지가 않다. 하나님도 성령님도 성자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 살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어느 날 과거를 생각하면서 지금껏 글로 쓴 것을 하나님께 이야기했다. 이러하니 나를 보고 누가 성경에 말한 자, 보낸 자라고 하겠느냐고 하며, 진리를 전하기는 좀 쉬워도 사명을 깨닫게 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런 꼴을 보이니 형제들도 개중에는 안 믿는 자도 있고, 예전에 처해 살던 때만 인식하고 나를 대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 여호와도, 성령도, 성자도 안 믿는 자는 안 믿고 불신도 하고 반대를 해도, 나 여호와의 뜻을 너를 통해 이뤘다. 아는 자만 기뻐 결혼하고 살듯 한다." 하셨다. 그리고 "후대들은 100, 200, 500년이 가면 너와 이 시대를 따른자 들이 볼 때 건물같이 되고 바다같이 된다."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뜻 있는 데에 결단코 행하시니, 낙심 말고 빈 몸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하기를 바란다.

 

▲ 316 휴거와 생명의 날 행사에 모여든 기독교복음선교회 회원들     ©jsmagazine.net

 

*이글은 오직 하나님중심으로 살아온 기독교복음선교회 정명석 선생님의 지난날 삶의 행적을 통해 그가 외치고자 했던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정명석 선생님의 저서인 나만이 걸어온 그 길을 재편집한 것으로써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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