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토크]가룟 유다는 무엇을 팔았을까

jsmagazine.net | 기사입력 2026/07/08 [14:22]

[뉴토크]가룟 유다는 무엇을 팔았을까

jsmagazine.net | 입력 : 2026/07/08 [14:22]

<가룟 유다는 무엇을 팔았을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엇을 팔았느냐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1) 다빈치 코드의 오류

 

8000만 부 이상 팔리고 영화로도 제작하여 흥행에 성공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외경인 빌립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동반자’였다는 표현을 단순하게 결혼 관계인 것처럼 왜곡하여 만들어낸 소설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향유 옥합을 바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베다니 마리아’다(요 11:2).

영화는 성배를 연관시키려 하지만 성경적으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있을 사건은 향유 옥합을 바친 일이다.

 

(2) 2000년 전 한 여인의 행동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깨뜨려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 발을 닦고 입을 맞춘 모습을 순수하게 보지 않은 이들이 있다.

2000년 전 일어난 사건으로 보면 당시에 죄가 많은 것으로 인식된 여인이 했던 행동을 보고서 예수님과 어떤 특별한 관계로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 마리아를 동일 인물로 혼동하여 누가 향유 옥합을 바쳤는지도 모르고 있다.

사실 이는 6세기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설교를 통해 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 마리아를 동일 인물인 것처럼 언급한 것이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3) 가룟 유다의 행동

 

문제는 가룟 유다의 행동이다.

당시 그는 왜 이 값진 물건을 팔아 가난한 이를 돕지 않느냐고 따졌고(요 12:4~6)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사건 바로 직후 대제사장들에게 달려갔다는 사실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로는 은 30세겔에 탐욕에 눈이 멀었다고도 하고 다윗 같은 강력한 메시아를 원했던 정치적인 방향 차이었다고도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후 가룟 유다가 그 돈을 성전에 다시 던져 버렸다는 것을 보면 탐욕은 이유가 아니다.

만약 정치적인 이유였다면 곧바로 예수님의 반대자 대제사장 가야바(마 26:3-4)를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4) 대제사장들이 원한 것

 

단순히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동선 정보를 팔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미 반대자들이 있는 곳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2: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반대자들은 예수님을 율법에 따라 정죄하기 위해 증거를 찾고 있었다.

 

(마가복음 14:55-56)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일단 그들이 찾은 것은 ‘신성 모독’ 죄였다.

 

(마가복음 14:61-63) 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하지만 이후 대제사장들은 로마 황제의 명령이 아니면 사형을 집행할 수 없으므로 ‘유대인의 왕’으로 반역죄로 몰아간다.

그리고 이후 총독 빌라도 역시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지만 그것으로는 죄가 없다고 시인한다(요 18:38).

 

그렇다면 대제사장들은 실질적으로 어떤 증거를 찾고 있었을까.

어떤 거짓말이 예수님을 실제로 죽게 만드는데 가장 효과적이었는가.

 

(5) 세례 요한이 죽은 이유

 

일반적으로 세례 요한은 순교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증거 사명을 제대로 못해서 죽은 것이 맞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마 3:3) 예수님 증거가 그의 할 일이다.

그러나 그는 헤롯 왕의 이성 문제를 들춰내다가 왕비의 원한을 사서 죽임을 당한다.

사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선지자처럼 여겨서 왕도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마태복음 14: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그런데 그가 죽게 된 이유는 바로 분봉 왕의 결혼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6) 가룟 유다가 결정적으로 변질된 이유

 

가룟 유다가 돈에 대한 탐욕도, 정치적인 방향 차이도 아니라면 무엇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을까.

바로 이성 문제 의혹이다.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바친 후 곧바로 대제사장에게 달려가는 부분을 성구로 찾아본다.

 

(마태복음 26:13-14)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예수님은 분명히 베다니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바친 사건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당당히 알리고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너무나 자신에 차고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영적인 사랑을 고백하고 예수님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것이지 육적인 사랑의 관계가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가룟 유다는 '그때에' 대제사장에게 달려간다.

‘그때에’라고 했으니 ‘바로 이어진 사건’이라는 뜻이다.

 

왜 가룟 유다는 향유 옥합 이후 곧바로 움직였을까.

 

(7) 육적 사랑과 영적 사랑

 

육적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이 문제이다.

세례 요한도 육적 사랑을 들춰내다가 사명을 실패했다.

흑암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을 통해서도 육적인 사랑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뜻을 깨뜨렸다.

창세기의 아담 역시 그러하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신랑과 신부로 혼인잔치 비유(마 22:2, 마 25:1)를 하시면서 영적인 사랑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이 부분은 사도 바울도 우리를 그리스도께 ‘중매’한다고 하여 영적인 신랑 신부 관계를 강조했다(고후 11:2).

가장 극적인 사랑 차원까지 오르니 반대자들은 그러한 사랑을 육적 이성 관계 차원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예수님이 40일간 금식하여 배가 무척 고프실 때 사탄이 나타나 육적인 양식인 빵(떡)으로 유혹하려 하자 예수님은 곧바로 영적인 말씀으로 대응하셨다.

 

(마태복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흑암 편은 '육'을 강조하고 하늘 편은 '영'을 말씀한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대립 구도가 반복된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께서 여자 제자들과 좋지 않은 관계라고 자꾸 나쁜 말을 퍼뜨리니 가룟 유다가 그런 말들에 현혹되어 육적 관점으로 향유 옥합 사건을 바라보니 생각이 변질되어 실제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8) 가룟 유다가 판 것

 

대제사장들이 관심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지나 정치 성향, 신성 모독 증거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을 완전하게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 방법은 바로 이성 스캔들이었다.

그것을 가룟 유다가 제공한 것이다.

가룟 유다는 베다니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드리는 모습을 보며 겉으로는 돈 얘기를 했지만 속으로는 '대제사장들이 평소에 말한 것이 맞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제사장들도 결정적으로 예수님과 대중을 분리시켜 완전하게 무너뜨릴 방법으로 육적 사랑으로 인한 이성 문제를 가룟 유다에게 세뇌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향유 옥합 고백이 있은 후 '그때에' 곧바로 지체 없이 대제사장에게 달려간 모습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이는 흑암이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이다.

영적인 차원의 것을 육적으로 변질시키니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는 클리셰cliché이다.

예수님은 당당하고 분명하게 베다니 마리아의 사랑 고백을 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후대에까지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가장 높은 차원의 영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 불을 보듯 예상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마리아의 사랑을 받아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복음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가룟 유다뿐 아니라 주변에 함께 식사하던 자들도 그 모습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리아의 고백을 받아주신 것은 용기있는 실천일 수밖에 없다.

 

베다니 마리아가 육적인 사랑으로 다가섰다면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마리아의 고백을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주신 것은 순수한 영적 사랑이었기에 가능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영적인 사랑의 견본이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서 성경에 기록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흑암은 가장 극적인 최고 차원의 영적 사랑을 가장 저급한 육적 타락으로 변질시킨다.

 

이제 우리는 가룟 유다와 같은 행동을 똑같이 반복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뒤에 따라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받아주셨던 그 지극한 영적 사랑을 우리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관점에서 향유 옥합을 바라보면 절대로 우리는 그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다.

 

(요한복음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영적 순전한 사랑.

예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기꺼이 받아주신 가장 차원 높은 사랑.

 

(*이 글은 작성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반영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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